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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Dec 08. 2022

삿포로에 갈까요

나이가 들수록 감정이 무뎌지고 아니 둔해진다고 여기며 산다. 첫눈이 오면 정호승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누구를 만날까 두근거리던 마음은 눈이 쌓이면 미끄러워질 노면을 먼저 떠올린다. 비라도 내리면 그저 비를 맞고 싶던 날도 아득하다. 심지어  미세먼지가 많은 비를 맞으면 탈모가 염려되고 혹여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기우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한여름 비가 내리던 날, 공부하던 독서실을 선생님 몰래 탈출하듯 벗어나 인근 제과점에 가서 먹던 소보로와 크림빵의 달큼한 맛. 배부르게 빵을 먹고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오면서도 마냥 신나고 즐거웠던 시간들. 


그 무뎌진 감성이 가끔 단어 하나. 아니 한 문장을 읽다가 덜컹하는 순간이 있다. 가뭄에 메마른 논바닥처럼 금이 가기 시작하긴 했지만 아주 딱딱하게 굳지는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아침 낭독 시간이 그랬다. 뇌를 고치는 방법이 궁금하다며 함께 읽었던 어려운 책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다음에 읽은 책은 시인과 한 기업의 CEO가 공저로 엮은 책이었다. 시인은 한 편의 시와 시인의 이야기를, 경영자는 시와 연관된 테마들을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로 풀어내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다음 우리 선택을 받은 책은 이병률 시인의 여행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이다. 미술 서적을 함께 추천했는데 낭독 동기들은 만장일치로 이 책을 골랐다.


30분 낭독을 하고 나면 맘에 꽂혔던 문구나 기억나는 말들을 서로 공유하곤 하는데 신기한 것은 서로 겹치는 문장이 많다는 것이다. 나이도 다르고 바라보는 방향도 조금씩 다르지만 좋은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의 기준점이 비슷하다는 표시일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오전 6시에 만나 책을 읽었다. 어제는 여행지에서 연인이 사준 새 신발 덕분에 헌신발을 버리는 상황이었을 때, 남겨진 연인이 너인 듯 바라볼 수 있도록 그 신발 그냥 두고 가라는 말에 심쿵했었다. 그는 떠나지만 그의 체취와 체온이 스며있는 낡은 신발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 마음이 애틋하고 따듯했던 까닭이다. 


오늘 공통적으로 꽂힌 문장은 바로 "삿포로에 갈까요"였다. 작가는 그 말에 당신을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삿포로에 가자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다른 문장들은 금세 까마득해지고 번갈아 가며 한 번씩 문장을 읊어보곤 행복한 웃음으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오늘따라 문장의 여운이 길게 남아 인터넷으로 삿포로를 검색하니 "겨울은 길고 길지만 눈이 있어 견뎌지는 설국"이라는 설명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소개글을 읽고 나니 더 궁금해지고 다정해진다.


누구에게나 설레는 장소,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하고픈 장소가 있다. 한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을 때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목조 주택이 자리 잡고 있을 것만 같은 그곳이 그리웠다. 문정희 시인의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외울 때는 한겨울 한계령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 아름다운 한계령에 묶이는 뜻밖의 축복을 상상하며 심장 한편이 쿵쿵댄 순간도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한 달여 동안 오두막집에서 사랑했다는 한 시인의 러브스토리를 읽을 때는 괜히 감정이입이 되어 얼굴이 발개지기도 했다.


문득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이 떠오른다. 강원도는 늘 먼 곳이고 아득한 지역이라 여겼다. 그곳을 2년여 동안 세 번 정도 찾기 된 것은 아들이 군 복무를 한덕분이었다. 운전병으로 지원했던 아들이 병과를 행정병으로 바꾸면서 뜻하지 않던 원주에 배치가 되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길이 험하고 멀어 원통해서 못살겠다고 했다는 인제 원통은 그 이후로는 듣기만 해도 반갑고 익숙한 지역이 되었다. 그런 인연 덕분에 아들 복무기간 동안 세 번이나 인제에 다녀왔다. 자작나무 숲은 한여름에 찾았다가 아이들 성화에 중도 포기한 이후로 다시 찾지는 못했던 아쉬움 가득한 장소이다.


인제읍에 자리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20년 이상된 자작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곳을 떠올리면 하얀 수피에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이국적인 풍광, 특히 겨울철 눈이 소복이 쌓인 숲이 그려진다. 왠지 수더분한 이층 집이 있을 것 같고, 그 길을 나란히 걷는 연인의 발자국들이 소곤대고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너무 멀기도 하고 한겨울에 그곳을 가려면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오늘은 문득 삿포로를 떠올리며 사랑을 말하던 시인처럼 나도 말해보고 싶어 진다. "눈이 내리면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갈까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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