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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Dec 15. 2022

가슴에 온기 가득해지는 날

날씨가 추워지면서 눈 소식이 기다려지는 즈음. 등지고 앉아 있는 사무실 창문 밖으로 가느다란 햇살이 쏟아지는데 인근 지역은 눈이 온다며 설산에 가려고 오후 휴가를 낸다는 지인의 목소리가 마냥 부러운 날이다. 산을 애정 하는 그는 자주 산을 찾는다.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스트레스가 많은 날은 더 자주 발길이 그곳으로 향한다. 소위 말하는 명산을 기본이고 이런 날은 으레 산에 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모처럼 지인들과 번개 점심 약속을 정했다. 나이도 성별도 다르지만 늘 만나면 편안한 사람들. 막걸리를 좋아해 안주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60대 두 명은 서로 죽이 잘 맞는다. 책을 즐겨 읽고 지혜롭게 잘 익어가는 분들이다. 그들과 평소 문학특강이나 공연도 자주 함께 한다. 공연 공지가 나면 예매를 해서 서로 일정을 맞추기도 하고 어느 날은 강의를 듣고 나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기도 한다. 어쩌다 주말에 시립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우연히 만난 듯 어우러져 커피를 마시며 두어 시간 수다를 떨기도 한다. 작가 특강에 갈라치면 사인받을 책을 서로 챙겨주기도 하고 문학은 물론 일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날씨가 추우니 뜨근한 국물이 좋겠다는 제안에 따라 갑자기 이뤄진 점심 번개 장소는 인근 양푼 동태탕 전문 식당. 점심시간에 맞춰 서둘러 도착한 식당은 맛집답게 오늘도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인다. 날씨가 추우니 따듯한 국물이 그리운 이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얼얼한 속을 해장하기 위해 찾은 이도 있고 우리 같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약속시간에서 2분쯤 지나 식당 실내에 들어서니 먼저 도착한 두 분은 벌써 막걸리 병을 앞에 두고 환한 표정으로 반겨준다. 푹 무른 무와 두부, 동태, 알이 가득 들어 있는 동태탕이 양푼 속에서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고 입안에서는 벌써 군침이 돈다.


오늘도 사는 이야기들과 소소한 일상들을 주고받으며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보다 자신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삶이 더 값진 것이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고 근간의 안부를 묻는 마음들이 따뜻하다. 인생 60세가 지나고 보니 그때는 목메듯 안달했던 일들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노라는 조언도 다정하게 스며든다.


뜨끈한 동태탕으로 속을 채우고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진하게 고아낸 수제 대추차와 에스프레소로 짧은 여유를 즐긴다.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점심시간이 아쉽지만 그만큼 더 짜릿하고 반가운 시간이다. 연배는 차이가 나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저 편안하고 즐거운 사람들이 곁에 있음에 한번 더 감사한 날. 아주 작은 재능에도 크게 박수를 쳐주고 뜨겁게 응원해 주는 그들 덕분에 오늘도 불끈 힘을 내며 세상으로 발걸음을 씩씩하게 내딛는다. 어느 날 문득 여행을 가면 꼭 운전기사를 하고 싶다고 자처하는 이가 있어서, 눈이 내릴 듯 아슴한 날 따듯한 밥을 먹으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들과 그녀 덕분에 가슴에 온기가 가득 해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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