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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Dec 18. 2022

첫눈

처음은 늘 설렘으로 다가온다. 첫 직장, 첫사랑, 첫눈, 첫 마음. 특히 첫눈은 더욱 그렇다. 특별히 만날 사람이 없어도 가슴 콩닥대는 추억이 떠오르지 않아도 그냥 기다려진다. 가끔은 눈이 내려도 내가 제대로 마음이나 눈에 뜸뿍 담지 못한 경우에는 첫눈이 아니라고 우기기도 한다.


낮부터 무언가 쏟아질 듯 흐리던 하늘에서 퇴근 무렵부터 비가 제법 내린다. 저녁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 낮에는 가까웠던 길이 어둠과 비 때문인지 꽤 멀게 느껴진다. 와이퍼를 부지런히 작동하며 운전대를 힘주어 꽉 잡는다. 애초 가려고 마음먹었던 식당은 불은 환하게 켜있는데 이미 영업이 끝난 듯 고요하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인근 식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날씨 탓인지 이곳도 한산하다. 쌈밥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넓은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에서 살랑살랑 방울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지붕 높은 통나무 식당. 한편에서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 둘이 소주를 주고받으며 큰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고 건너편에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 세명이 삼겹살을 구워 쌈밥을 먹는 모습이 여유롭다.


30대쯤이었을까.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젊은 직원들과 저녁을 먹고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무엇이 그리 즐거웠는지 추운 줄도 모르고 팔짱을 끼고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가끔은 쏟아지는 눈발을 보면 낭만이나 설렘보다 미끄러운 길이 먼저 떠올라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여전히 첫눈은 추억을 소환하고 낭만을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이다.


누군가는 아득한 첫사랑과의 데이트나 설렘을 떠올리고 어떤 이는 아픈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고개를 흔들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갈라지고 무뎌지는 감성에 첫눈이 쏟아지면 그 틈새 사이로 물기가 고이고 마음에 작은 여유가 스며든다.


돌솥밥 뜨근한 누룽지까지 먹고 나니 마음까지 후덥 해진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눈은 잦아들었다. 인근에 있는 야외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카페에 들어서니 궂은 날씨 탓인지 주인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다. 고즈넉한 공간 가득 커피 향이 묻어나고 공간 곳곳에 주인의 야무진 손길이 느껴진다. 기타와 무지개색 가발이 놓여있는 포토존의 뒷 배경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글귀가 네온사인으로 새겨져 있고 다른 한편 벽에는 캘리그래피로 '함께라서 행복한 날'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눈이 내린 탓인지 허했던 뱃속이 뜨듯한 음식으로 가득 찬 덕분인지 잠깐 그곳에 앉아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만 배경만 찍는 것으로 마음을 추스른다.


투명 유리 주전자에 담긴 캐모마일이 우러나기를 기다린다. 조용하고 호젓한 카페 분위기에 전세라도 낸 듯 잠깐이지만 호사를 누린다. 마을에서 계모임을 마친 어르신들이 단체로 몰려와 대추차를 주문하기 전까지였지만. 소란해진 분위기가 심란해져 마시던 차를 조금 남겨둔 채 카페를 나선다. 한동안 폭설이라도 내릴 듯 뿌리던 눈의 흔적은 자동차 지붕 위에만 남아있다. 비가 먼저 내린 탓에 어느새 흰 눈은 흔적도 없어진 것이다. 마치 대낮에 선잠을 자다 꿈을 꾼듯한 기분이다.


매일 넘어지고 갈라지는 하루하루.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기도 하고 혹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들로 쓰러지기도 하지만 첫눈 덕분에 잠시나마 여유를 즐겼던 하루.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도 같아서 달기도 하고 때론 쓰기도 하다. 늘 단맛만 즐길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쓴 맛이 아주 없다면 어쩌면 너무 권태로울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신다는 말에 위안을 삼으며 오늘의 고된 일상 또한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다디단 시간이고 성숙의 계단이라 여긴다. 연일 이어지는 송년 모임에 몸이 고되지만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이 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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