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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Dec 31. 2022

나에게 고맙다

한해의 마지막 날

길게는 40여 년, 짧게는 5년 미만까지 근무기간이 다양하다. 매년 연말에 이뤄지는 퇴임식. 올해는 어느 때보다 풍성하게 행사가 치러졌다. 6개월 퇴직준비교육 대상자를 포함해 거의 30여 명에 이른다. 첫 발령당시 앳된 모습에 근무경력을 병기한 소개 자료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때는 그랬구나 하면서 그 또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지금은 평생직장 개념이 없어진 터라 한 직장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는 이들이 흔치 않지만 이곳은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 특성상 길게는 40여 년 근무 경력을 가진이들도 만날 수 있다. 떠나보내는 방식도 다양하다. 가장 기본적인 축하방법은 꽃다발이다. 화관에 꽃 목걸이를 비롯해 리본을 달고 선물이 되는 직원들과 아쉬운 마음을 담은 다채로운 현수막까지. 어떤 이는 꽃다발이 너무 많아 주체 못 하기도 한다. 


연말즈음 정기인사가 겹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기.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미역국을 먹고. 그러던 중 사람 좋기로 소문난 직원의 갑작스러운 변고 소식. 삶이란 게 무엇일까 새삼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 한순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손바닥 안에서 스르르 빠져버리는 작은 모래알처럼 덧없는 것이 삶일진대 무슨 욕심을 그리 부리며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한해의 마지막날인 12월 31일. 새로운 한 해 동안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어떤 것을 할까 고민하며 목록을 적던 날이 얼만 안된 것 같은데 벌써 그 시간들을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아니 차곡차곡 빨래를 개듯 갈무리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다. 이제는 머리를 길러보겠다며 버티던 남편은 미용실에 다녀오고 아들은 일주일 동안의 짧은 휴식을 뒤로하고 떠날 채비를 한다. 송년회 핑계로 한동안 미뤘던 집안을 청소하고 모처럼 여유롭게 노트북을 켠다. 할 일들이 있지만 왠지 오늘은 지나온 시간들을 한 번은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랄까. 


올해 제일 잘했다고 칭찬하고 싶은 일은 미뤄왔던 공부를 다시 시작한 것과 나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 글을 300여 편가량 썼다는 것이다. 변함없이 책을 많이 구입하고 빌렸지만 머릿속에 남은 대목들이 별로 없음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또한 즐기고 있으니 만족하기로 한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왔던 식단들과 생활습관들이 많이 무너졌음은 심기일전해야 할 목록 중의 하나다.


가족들은 부족한 나를 늘 일으켜 세워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주었고 잘 살고 있다고 북돋워주는 이들 덕분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면서 걸어온 365일. 새해에는 곳곳에 흩어져있는 내 마음들을 한 곳에 모두어 집중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홀로 있어도 가득한 시간들 속에서 나를 자주 들여다볼 것.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타인지향 시나리오에서 벗어나 지혜롭게 성장하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도록 지금 그리고 여기에 오롯이 몰입할 것. 새해 내가 희망하는 일의 목록들은 올해와 별 차이가 없을 듯하다. 다만 더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되 깊어지기를 바랄 뿐. 항상 아쉬움이 남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준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박수를 그리고 한 해 동안 애썼어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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