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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an 19. 2023

링거 맞고 무등산에 갔다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는데 힘들게 등산을 왜 할까라는 질문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어보나 마나 무의미한 질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 힘든 산을 왜 오르고 싶을까 궁금해하는 부류에 속한다. 모처럼 큰 맘을 먹고 등산을 갔다가도 가파른 길이 나오고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금세 후회하곤 한 경험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근력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시로 듣지만 운동을 습관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나마 실천하는 것은 일상에서 걷기 정도. 한동안 1일 만보 걷기를 목표로 한 적도 있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그 또한 잊고 산 지 수개월. 그런 와중에 직장 산우회에 덜컥 가입했다. 회비 이체신청 3개월 만에 2023년 1월 산행에 참가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건만 일주일 넘게 떨어지지 않는 감기기운 때문에 그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 자초지종을 들은 산우회 열혈 총무는 나에게 링거를 맞아볼 것을 슬쩍 권유했다. 귀가 얇은 나는 체력이 달릴 때 맞으면 효과를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산행 하루 전날 오후 링거를 맞기에 이르렀다. 수액 덕분인지 콧물이 살짝 나오기는 했지만 기력이 회복되는 기분에 산행에 참석하겠노라고 최종 문자를 보내고 잠을 청했다.


드디어 등산 당일. 오전 6시부터 일어나 설산을 대비해 처음 구입한 아이젠과 스패치를 비롯해 에너지바, 바나나, 컵라면에 보온병까지 챙겨 서둘러 출발장소로 향했다. 동행하는 절친 언니도 내 보온 도시락까지 챙겨 들고 출발시간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비몽사몽 졸면서 두 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광주 무등산 원효사 주차장. 당초 설산에서 아름다운 상고대를 기대하며 계획된 산행이건만 하늘에서는 기상예보대로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형형색색 우의를 입고 준비운동을 하는 다른 일행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우의는 생략하고 보온 도시락까지 넣어 무거워진 배낭을 메고 야심 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오늘 코스는 원효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서석대와 입석대, 장불재, 중머리재를 거쳐 증심사까지 총 12km. 왕복 예상시간 총 5시간 30분. 


수년동안 등산으로 날렵해진 산우회 회원들은 선두에 서고 등린이를 자처하는 나와 동료 언니는 맨 뒤에서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린 탓에 눈은 거의 녹았고 간간히 음지에만 흔적이 남아있었다. 일명 무등산 옛길은 많이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노면이 대부분 돌로 이어져 있어 계속 바닥을 쳐다보고 걸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오르막 길을 힘겹게 오르다 지칠 무렵이면 신기하게 야자매트가 깔린 평지가 이어졌고 이 정도면 걸을만하다 싶을 때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지는 코스. 발이 시릴까 두 겹으로 겹쳐 신은 양말 덕분에 발가락은 둔했고 모처럼 산행을 대비해 구입한 새 등산화는 흙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살포시 내린 이슬비로 머리는 비 맞은 생쥐처럼 촉촉해져 곱슬거렸고 자욱한 안개 덕분에 꿈속을 걷는 듯 아스라한 전경 속을 계속 걸었다.


일부 회원들은 상고대를 기대하고 왔는데 비가 온다며 아쉬워했지만 등산초보인 나는 설산이 아닌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산행을 이어갔다. 2시간여를 올라가 가만히 서 있어도 다리가 혼자 후들거릴 무렵 드디어 1100m 고지 서석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인가. 정상에 도착하니 이슬비에 안개까지 끼어 어슴프레 하던 하늘은 어느새 사라지고 신비로운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저 감탄사만 불러일으키는 운무가 눈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고 언제 비가 내렸을까 싶게 포근한 햇살이 환하게 우리를 맞이했던 것이다. 힘들다는 말은 어느새 잊어버린 채 멋진 경관을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으며 황홀지경을 맛보았다. 낚시를 즐기는 이들이 손맛 때문이라면 산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 맛에 산에 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 출출해질 즈음이라 햇살 좋은 바위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그렇게 나는 내려갈 길이 훨씬 멀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산행의 묘미를 만끽하며 희희낙락했다.


해발 1,187m의 무등산은 ‘비할 데 없이 높고 큰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고귀한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서석대, 입석대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치솟아 있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특히 서석대는 입석대와 함께 무등산의 대표적인 주상절리로 천연기념물이다. 서석대는 물론 내려오는 입석대 또한 신이 빚은 듯 신기한 암석의 모형들은 절로 발길을 멎게 한다. 비가 내린 덕분인지 내내 말을 걸어오는 청청한 물소리를 친구 삼아 하산길을 재촉했다.


링거 덕분인지 모처럼 산의 맑은 정기를 받은 까닭인지 다리는 천근만근인데 감기 기운이 뚝 떨어졌다. 예로부터 산에 다녀오면 보약한재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본다고 하던데 그 덕분인가 짐작할 뿐이다. 대신 허벅지와 종아리는 남의 것이 되었다. 앉았다 일어날 때는 물론이고 특히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아'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난감한 상황. 아마 얼마간 시간이 지나야 근육이 풀릴 것이고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 그나마 수월해질 것이다. 일 년에 두어 번도 오르지 않는 산에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올라갈 마음을 먹었는지 모를 일이다. 산행 시간이 길어지면서 괜한 짜증을 내는 나에게 동행한 언니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늘 무등산에서 봄과 여름, 겨울을 함께 만난 기분이야"라며 내내 산행의 행복감을 표현했다.


하산하자마자  "다음엔 지리산 가요. 문제없겠어"라며 환한 표정으로 반겨주신 산우회장님 말에 화들짝 놀랐던 첫 산행. 그의 말대로 링거를 맞고 우중에 만난 광주 무등산행은 한마디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느낌이었다.

다리는 무겁지만 조상들이 왜 이곳의 명칭을 '무등산'이라고 했을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산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쥐꼬리만큼은 체험한 시간. 고귀한 산으로 불리는 무등산 정기 덕분에 올 한 해 내내 건강하고 무탈하길 바란다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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