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은숙 Feb 05. 2023

거절 못하는 것도 병이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으면 잘 거절하지 못한다. 특히 사적인 일인 경우는 웬만하면 조금 손해 보더라도 상대를 배려해주려고 하는 편이니 당연한 결과이다. 어떤 때는 혹시 결정장애인가 싶을 정도로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저것인가 싶어 갈팡질팡하며 심리적으로 갈등을 겪거나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살다 보면 몸이 피곤한 경우가 많다. 물론 마음은 편할 때도 있지만.


사무실 동료들 모임부터 동문회, 취미활동하는 단체에 이르기까지 10여 개가 넘는 모임을 유지하면서 가장 난감한 것은 임원을 맡을 때이다. 작은 소모임이라 별다른 행사가 없는 경우는 상관없지만 총동창회 같은 경우는 연중 큰 행사를 치러야 하고 수시로 챙겨야 할 일들도 많다. 물론 직책에 따라 난이도는 다르다. 4년 전쯤 동문 행사에서 사회를 보면서 총동창회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게 되었다. 도움을 청해서 한번 도왔을 뿐인데 마음에 드셨던지 다음 해 임원 부탁을 받은 것이다. 건강도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여러모로 일이 많은 직책이었기 때문에 거절의사를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장은 코로나 시기여서 할 일도 없고 본인이 다 하겠노라며 직책만 맡아달라고 했고 그렇게 임기 2년을 채웠다. 회장님 말대로 첫해는 행사를 다 패스했기에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었지만 늘 마음이 쓰이는 것은 피할 수 없었고 지난해는 코로나가 완화되면서 송년회까지 두 번의 행사를 치러내야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무난하게 임기를 채운 탓인지 차기 동창회 임원으로 또 제안을 받은 것. 절대 못한다고 버텼지만 수 차례 전화를 걸어 간곡하게 부탁하는 선배에게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워 결국은 또 수락하게 된 것이다. 총 동창회장 이취임식에서 만난 후배는 또 임원을 맡게 된 이유를 들은 후 마음이 약해서 또 수락하셨군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후배는 어떻게 거절했냐고 물으니 "전화는 안 받고 문자는 씹었어요"라고 말한다. 나는 차마 그렇게까지 못하겠더라고 했더니 "그러면 거절이 어렵죠"라고 답한다.


누군가 부탁을 했을 때 나를 비롯해 우리는 보통 거절을 하면 상대방이 많이 서운해하고 힘들어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고민을 하게 된다. 수락할 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거절을 해야 할 경우 고심 끝에 조심스레 대답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상대방은 내가 거절해도 생각만큼 크게 실망하거나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말 그대로 나는 그의 입장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대안을 고려하고 제안할 수 있으니 무리하면서까지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고민은 하되 여러 번 고심을 했지만 어렵게 됐다는 것을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게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임원은 이번으로 족하다고 장담했던 후배 한 명도 강력하게 거절의사를 관철시키지 못한 내 덕분(?)에 다시 임원진에 합류했다. 그 또한 선배 탓이라며 나를 원망했지만 아마도 그와 나는 2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임원으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힘을 모을 것이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를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책임 있는 희생이 불가피하다. 특히 대규모 행사를 하거나 기획할 때는 리더는 리더대로 방향제시를 하면서 총괄을 해야 하고 일부 임원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 챙기며 세세하게 준비해야 펑크가 나지 않고 당초 기획한 대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출한 이취임식 이후에 새롭게 꾸려진 임원들과 올 한 해 행사와 운영계획 논의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고 두어 시간의 회의를 마친 후 함께 손을 모으고 잘해보자는 파이팅을 크게 외치며 따듯하게 마무리되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나 힘은 미미하지만 나의 수고 덕분에 다수가 다정하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또한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너무 벅차고 힘겨워진다면 한 번쯤은 거절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줍지도 않은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흉내 내느라 정작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도 돌아볼 일이다.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도 따져 볼일이다. 타인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일단 보살피고 챙겨야 할 것은 바로 소중한 '나'일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MZ세대와 라테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