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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Feb 23. 2023

"그녀를 믿으세요"

귀가 얇고 단순한 편이어서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믿는다. 이면을 생각하며 듣는 경우도 거의 없다.'싫다'라고 말하면 싫은 거구나 여기고 '좋다'라고 말하면 정말 좋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순진하다거나 심하게는 '바보'냐고 하는 우스개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간혹 꼭 믿어야 할 말이나 상황에 닥쳤을 때는 의심병이 도진다는 것이다. 


 아들과 함께 홍성으로 향하던 이른 아침.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에 진입해 10여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도로 상황을 알려주는 전광판에 도로 구간 중 한 곳에서 사고가 발생해 5km 정도 정체가 있다는 안내문자가 떠있었다. 그때까지도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지 없이 주행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내비게이션이 탄천 ic 출구를 알려주며 빠져나가라고 안내한다. 목적지에 가려면 수덕사 ic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당황스러운 상황. 아들에게 얼른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켜보라고 말하며 순간 갈등한다. 그녀의 말을 믿을 것인가, 평소 루틴대로 갈 것인가. 


그 상황을 지켜보던 아들이 "엄마, 네비가 알려주는 대로 가"라고 빠르게 결정해 준다.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고속도로 출구 방향으로 깜빡이를 켰다. 그런데 다음이 더 문제였다. 국도로 진입한 후 시골 외곽도로로 안내하는 것.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올 수도 없으니 직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그녀는 남공주 ic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할 것을 지시했다. 낯선 길을 돌아온 것은 여전히 의문스러웠지만 도착시간에는 변동이 없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핸드폰으로 확인한 결과 화물차에 적재된 병맥주 상자가 도로에 쏟아져 1시간 이상 교통이 정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후휴'하는 순간.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평소대로 주행했으면 벌어졌을 일을 생각하니 아찔할 뿐이었다. 


예전에 네비가 없던 시절에는 자가용마다 전국지도 한 장 정도를 비치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물론 도로마다 설치되어 있는 간판도 꼼꼼히 살펴야 했다. 낮시간은 그나마 나은데 야간에 낯선 곳에 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입출구를 지나치거나 잘못 진입해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안면도를 가려고 나섰다가 세 차례나 길을 잘못 들어 남편과 말다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도 있다. 


일상생활이 모두 기계화되고 자동화되면서 편리해졌지만 단점들도 많다. 예전에는 다 외우고 다녔던 전화번호는 휴대전화를 애용하면서 가족들 번호 외에는 거의 외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너무 의지하다 보니 같은 장소를 여러 차례 다녀와도 잘 기억하지 못할 정도이다. 특히 나 같은 심한 길치에게 내비게이션은 필수불가결한 항목이 되었다.


날로 급변해 정신줄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내 몫을 챙기기도 어렵다고 말하는 시대. 낯선 사람과 함부로 말을 섞어도 안되고 쉽게 내 마음을 보여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물론 의심하는 마음 없이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도 말라고 한다. 그럼에도 오늘도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안내를 종료한다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출근하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무튼 당분간 나는 무조건 그녀를 믿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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