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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un 07. 2023

거절하는 기술

나이가 들면 가슴이 넓어지고 더 너그러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세월을 겪으면 시야가 깊어지고 통찰력도 더 많아질 것이라 믿었다. 공자는 40세가 되면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50세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알게 되고 60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반생을 넘게 산 내 삶의 궤적들을 돌아보면 전혀 맞지 않는다. 오십여 년을 살았지만 여전히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작은 바람에 일렁이고 단순한 세상의 이치를 몰라 허둥대는 것이다.


많은 모임에서 사람을 만나고 부딪친다. 먼발치에서 그림자만 보여도 편안한 사람들도 있고 어쩌다 인연이 돼서 자주 만나지만 속내를 드러내기가 부담스러운 이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관계를 정리하는 기술에 대해 고민하지만 쉽지 않다. 모임은 계속 늘어나는 중이고 휴대전화 일정표도 여전히 빼곡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거절에 실패했다. 완곡하게 표현한 것을 승낙으로 이해한 것인지, 거절의 표시라고 여기면서도 당신들이 필요하니 모르는 척한 것인지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여전히 마음을 결정하지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또 연락이 왔다. 이렇게 저렇게 결정이 다 된 상태라는 최종 통보도 함께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남편에게 상의하면 나의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문제라고 말할 것이다. 피곤하고 힘들다면서 정작 가지치기에 젬병인 내탓이라고.


2년 전에도 그랬다. 건강 상태까지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었기에 거절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상황을 적나라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고 여러 번에 걸친 그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만큼 냉정하지 못한 것이 사단이었다. 직함만 갖고 있으면 된다는 그의 말은 어김없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이어졌고 오히려 임기를 마치고 나서는 한 단계 더 높은 직함을 맡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들어 코로나 시국이 더 좋았던 점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답답했지만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식단이 건강해졌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책을 읽고 평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많아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함께 하지 못한 엄마와의 데이트 시간도 많아졌었다. 단순한 듯 하지만 느림과 쉼 덕분에 행복지수가 저절로 높아졌던 경험이다.


살면서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자신의 일상이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믿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거절하는 기술이다. 누군가의 부탁이나 제안을 모두 수용해도 힘들거나 스트레스가 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그것이 힘겹다고 느끼거나 부담으로 작용한다면 제고가 필요하다는 반증이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단칼에 자르듯이 하지 말고 여지를 남기면서 완곡하게 거절할 것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왜 이리 어려운지. 매번 나 자신을 최우선이라고 여긴다고 하면서 알고 보면 늘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자 머물면서 즐기는 시간보다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주말 일정 두 개가 늘어났다. 하나는 업무와 관련된 것이고 하나는 거절에 실패해서 추가된 일정이다. 다음 주에 예정되어 있는 시험 준비도 해야 하고 주중에 누적된 피로해소를 위한 휴식시간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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