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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un 01. 2023

참 다행이다

"잘 쓰지도 못하면서 왜 글쓰기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에 시인이신 은사님은

"쓰고 싶은데 참는 일도 어렵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냥 안 쓰면 그만이지 그게 뭐 어렵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글을 쓴다고 밥이 나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미련을 갖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 정돈하고 나를 돌아보는데 '글쓰기'만 한 처방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창 시절 방학 때마다 제일 어려웠던 과제물이 '일기' 였던 것을 떠올린다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마음밭에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 조각들을 글로 풀어놓는 것이다. 일기장처럼 비밀스러운 공간에 쓰는 것이 아닌 터라 두루뭉술하게 상황이나 사건들을 열거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헝클어진 고리들을 정돈하고 보듬는 데는 특효약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꼭 해답을 얻지 못해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진솔하게 털어놓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고 편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다른 한 가지는 시를 외우는 것이다. 한 줄 한 줄 집중해 읽으면서 읊조리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들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쪼그라든다. 요즘 차 안에서 낭송하는 시는 이기철 시인의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이다. 읽다 보면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문장들이지만 그 의미들에 집중하고 읊다 보면 흙탕물처럼 어지럽던 심경이 차분해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독서도 비슷한 효과가 있다. 나의 경우는 평소 즐겨읽는 수필이나 소설보다 삶의 진리가 녹아있는 잠언집이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법구경이나 채근담. 최근에 읽고 있는 책중의 하나는 17세기 최고 작가로 평가받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잠언 300개가 담겨있는 <아주 세속적인 지혜>이다. 짬짬이 시간을 내서 한 꼭지씩 읽기도 좋을 뿐 아니라 400년 이상 전에 쓰인 글임에도 현재 시점과 잘 맞아떨어진다. 세상과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생의 희로애락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속적이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인 지혜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쭈글쭈글해 있던 마음조각이 조금씩  환해지는 기분이 든다.


누구나 삶에 자신만의 힐링포인트가 있다. 직장 후배 중에 한 명은 최근 마라톤에 푹 빠져 만나기만 하면 찬사를 늘어놓는다. 힘들기만 할 것 같지만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황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텃밭 가꾸는 일만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씨앗을 뿌리고 그것이 발아해 매일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생명의 탄생과 변화를 지켜보는 일처럼 신비하다는 것. 집에서 멀리 떨어진 텃밭에 오가는 기름값을 따져보면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크지만 과정 속에서 얻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


나이가 들수록 꼭 필요한 것이 자신과 어울리는 '쉼'의 여유와 공간이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생각의 고리들을 다 잊은 듯 걸어보는 일. 좋아하는 시집이나 소설 한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졸필이라 어디 내놓기는 민망할지라도 진솔한 마음들을 편안하게 글로 적어보는 일.


참 다행이다. 오늘도 이른 아침, 시집을 들추며 마음을 간질이는 시 한 편을 필사할 수 있어서. 언제 읽어도 명문장을 술술 풀어내는 작가들을 부러워하면서 나만을 위한 글을 끄적일 수 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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