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친구에게
눈물지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위로해 줄게
동요 제목들이 모두 시어처럼 곱다. '노을 지는 강가에서', '하늘물', '봄을 닮은 벚꽃비', '봄아 오랫동안 놀다가렴', '너도 예쁘고 나도 예쁘다', '달팽이 친구에게'..... TV 채널을 숱하게 돌려도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켜도 동요 듣기는 어렵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한동안 트롯경연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것은 트롯무대이고 그나마 취향이 발라드인 탓에 가끔 유튜브로 김동률, 카더가든, 잔나비 노래를 듣는 정도.
지인이 10년째 지역에서 어린이 동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평소에도 동요를 좋아하고 책을 즐겨 읽는 그는 어려운 여건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대회를 연다. 이 대회에서 내빈들은 간단한 축사를 하고 나서 '고향의 봄' 같은 동요를 함께 부른다. 물론 사전 리허설은 없다. 즉석에서 사회자의 주문대로 합창을 하는 것이다.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그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처음에는 어색한 표정을 짓지만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모두 눈가에 미소가 어리고 얼굴 표정도 온화해진다. 관객들도 함께 따라 부르며 금세 표정이 순해지는 신기한 마법이 펼쳐진다.
이번 경연에 참여한 팀은 모두 16팀.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가까운 지역보다 멀리 거제도, 경남 창원, 서울까지 먼지역에서 온 친구들이 대다수이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까 할 만큼 청아하고 맑은 음색에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더 매료되는 것은 시어처럼 이쁜 동요 가사들이다. 신명 나는 엿장수 할아범의 장단으로 시작한 무대는 갈수록 열기를 더하고 아마추어 귀로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렵다. 출연자가 나올 때마다 '너무 잘한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뿐이다. 동요에 애정이 많은 사회자는 참가자 소개를 할 때마다 노래제목과 가사에 대한 친절한 설명으로 분위기를 더 다정하게 이끌어 간다. 역시 무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의 표정은 기침이나 가난, 감기처럼 감추기는 어렵구나 하는 사실을 체감한다. 16명 출연자 중 12번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즈음, 갑자기 가슴 한편이 멈칫거린다.
천천히 와도 괜찮아 내가 너를 기다려줄게/ 멈춰서도 괜찮아 내가 먼저 다가갈게
너의 손 꼭 잡고 너의 눈 바라보며/ 너의 마음 이야기 들어줄게 들어줄게
(중략)
눈물지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위로해 줄게/ 실수해도 괜찮아 내가 너를 품어줄게
너의 손 꼭 잡고 너의 눈 바라보며/ 너의 마음 이야기 들어줄게 들어줄게
(중략)
동요 제목은 '달팽이 친구에게'. 초등학교 4학년 친구가 부르는 동요 단어 하나하나가 위로의 말로 스며드는 순간이다. 멈춰서도, 눈물지어도, 실수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이 삶에 지쳐 쉼이 필요한 나에게 던지는 이야기처럼 천천히 나를 물들인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온기 가득한 말을 건네본 기억이 있었던가.
힘겨워 문득 꿈이나 희망이라는 말을 포기하고 싶어 질 때, 너무 팍팍하기만 한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은 날, 이런 말을 건네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에게 위로를 받는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이런 날 나는 주로 책을 읽는다. 때로는 시로 어떤 날은 산문집의 한 줄 글귀에서 위안을 얻으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책을 즐겨 읽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 또한 그런 기대 때문일 것이다. 자꾸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좀 더 지혜롭게 이끌어 주고, 잘 살고 있는지,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을 때 방향을 알려주는 것도 책이다.
조금 세게 밟기만 해도 순식간에 바스러지는 낙엽, 사철 내내 나를 지켜둔 두꺼운 옷을 다 벗고도 꿋꿋하게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야하는 겨울나무처럼 움츠러들고 작아지는 계절이다. 달팽이 친구에게 온기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작은 꼬마 같은 고운 친구가 있으면 참 좋겠다. 눈물지어도 괜찮아. 내가 너를 위로해 줄게....라고 말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