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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ul 29. 2022

10점 만점에 10점

당신은 만성 스트레스입니다

게으름 탓에 미뤘던 체크카드 신청을 위해 사무실 근처 민원동에 있는 농협출장소를 찾았다.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1분 정도 거리임에도 정수리에 꽂히는 햇살의 두께에 저절로 걸음이 멈칫한다. 농협에 도착해 번호표를 뽑고 드디어 내 차례.  신분증을 받아 든 창구 직원이 일을 처리하다가 너무 오래 안 써 거래 정지가 된 통장은 카드 발급이 불가하다며 인터넷뱅킹으로 비대면 통장 개설을 권유한다. 헛걸음했구나 싶어 이내 포기하고 민원실을 빠져나오는데 통로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대의 기계가 눈에 들어온다. 스마트폰 소독기, 체지방 측정기를 비롯해 스트레스 및 혈관 건강도 측정 헬스 체커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일도 허탕 쳤는데 건강체크라도 하고 갈까 하는 마음에 스트레스 측정기 앞에 앉는다. 


안내 배너에 손가락 끝을 실리콘 센서에 살짝 올리고 1분 동안 움직이면 안 된다는 설명이 쓰여있다. 최대한 얌전한 자세로 앉아 센서에 검지 손가락을 얹고 나이와 성별을 입력한 후 시작 버튼을 누른다.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스트레스의 신체적, 심리적 증상과 해소법이 차례대로 화면에 나온다. 예를 들자면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흡이 짧아지기 때문에 '호흡하기'가 도움이 된다. 또한 깊은 심호흡은 흥분을 가르쳐줄 뿐 아니라 긴장 이완과 스트레스 감소와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는 내용 등이다. 손가락을 얹고 설명을 읽다 보니 금세 1분이 지난다. 검사 결과는 시간. 그래프, 심박 분포, 측정 심박수에 이어 스트레스 지수가 1~10까지 눈금으로 표시된다. 숫자가 높을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란 문구를 읽고 눈금을 확인한다. 믿기지 않는다. 눈금이 10점 만점에 10점을 가리키고 있던 것이다. "당신은 만성 스트레스 상태입니다"라는 자세한 풀이까지 읽으면서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순간이다.


직장 생활을 비롯해 좋아해서 꾸준하게 이어오고 있는 취미활동까지. 누가 봐도 바쁜 삶을 살아왔지만 그것이 최선이고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며 살아온 날들이다. 2년여 전 건강에 이상이 오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온 일상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해왔고 버거웠음을 알게 된 탓이다. 그 이전에는 구내염을 별스러운 증상이 아니라고 여겼다면 그 시점부터는 웬만한 일들은 정리하고 몸이 피곤하다고 말하기 전에 쉬려고 애썼다. 수면시간을 최대한 늘렸고 편식이 심했던 식습관도 개선 중이다. 멍 때리거나 생각 없이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쉼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몸으로 체득하는 시간을 보냈다고 믿었던 즈음이다. 간이용 체커기 결과에 과민반응인가 싶지만 나도 모르게 2년 전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최근 들어 다시 빽빽해진 일정표가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분명히 아픈데 병명을 특정하지 못할 때 의사들은 거의 대부분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일정량의 스트레스에 익숙해져 그것을 당연한 무게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진다. 어느 날 까닭 모를 통증을 느끼거나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동안 내 몸과 마음이 힘들었음을 간신히 인정하게 된다. 구내염을 늘 달고 살고 잦은 감기나 피곤한 증상이 이제 쉬어야 한다고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임을 무시하거나 모른척하는 시간들이 한참 지난 후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큰 일어난다는 의사의 심각한 말을 듣고 나서야 그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폭염 속을 걸어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오후 업무를 이어간다. 오전에는 낮았을 텐데 아마도 오후 시간이라 수치가 높았을 거야라며 이내 별일 아닌 듯 나를 세뇌하는 즈음. 옆자리에서 민원인과 통화하다 언성이 높아지는 직원의 목소리에 갑자기 신경이 쭈뼛 일어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마디 내뱉는다. "내 스트레스 지수가 10점 만점에 10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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