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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Aug 02. 2022

도둑 독서

몰래 읽는 책이 더 재미있다

 오래간만에 타 부서 행사 지원 때문에 공휴일이지만 평일처럼 출근한 날. 20여분 걸리는 행사장에 도착해 근무자용 단체 망사조끼와 주차봉을 건네받고 근무를 시작했다. 오늘 임무는 어린이날 행사장을 찾은 시민을 안내하는 안전 진행요원이다. 오전 9시부터 배정된 근무 위치에 서 있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는 아파오는데 인파가 많지 않다.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더 많은 덕분이다. 안내할 사람이 많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상황. 멍하니 서 있기도 애매해질 무렵 종이백에 챙겨 온 책이 떠올랐다. 오른손에는 주차봉을, 왼손에는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소설책 한 권을 들고 근무를 이어갔다. 먼발치에 어린이 손을 잡은 사람들이 보이면 얼른 책을 덮고, 사람이 안 보이면 읽기를 서너 시간. 다리는 아팠지만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들킬까 눈치를 보며 교과서 뒤에 책을 놓고 읽는 것처럼 짜릿한 즐거움이 있다. 


소설은 가정집들 사이에 문을 연 평범한 동네서점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작은 상처와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 얼마 전에 읽었던 불편한 편의점처럼 늘 익숙한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더 공감이 되고 페이지도 술술 넘어간다. 취준생의 이야기가 나올 때는 아들과 딸도 이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싶고,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잘 맞지 않는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지미 씨의 고민을 읽다 보면 예전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간혹 울긋불긋 등산복을 챙겨 입은 관광객 어머니들의 단체사진 촬영 부탁으로 방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디단 시간이었다.   

  

학창 시절 시험기간이 되면 꼭 평소에 미뤄놨던 일들을 하고 싶고, 어렵게 다이어트를 결심하면 이내 먹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서 괴롭던 기억이 있다. 평소에 시간이 있어도 늘 미루며 게으름을 피우던 책 읽기였는데 땡볕에 서서 눈치를 보며 읽는 그 시간이 왜 그리 짜릿하고 행복하던지. 다리는 퉁퉁 붓고 뜨거운 햇살에 손등은 까맣게 탔지만 모처럼 독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어 불만으로 가득 찼던 상황들이 상쇠 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늘은 내친김에 염색을 하기 위해 찾은 미용실에서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책을 읽었다는 사실. 매번 빈손으로 가서 멍 때 리거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던 시간을 모처럼 유용하게 활용한 셈이다.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요즘 들어 책 읽을 시간이 부족했던 이유를 알게 된 경험이다.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 정해진 시간에만 읽으려고 했지 짬짬이 독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항상 책 한 권 정도는 챙겨갖고 다녀야 마음이 편안하고 어떤 것보다 책 선물을 좋아한다. 읽고 나서 금세 내용을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읽은 책을 또 사기도 하고 빌려오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그 내용들이 내 몸 어딘가에 그리고 내 기억의 저편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나 아닌 타인들의 삶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들을 겪으면서 그만큼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까만 얼굴은 더 타고 다리는 아팠지만 도둑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된 날. 오늘은 읽다 덮어둔 소설 내용이 궁금해 밀린 강의 듣는 일은 내일로 미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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