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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Aug 04. 2022

살기 위해 걷는 나이

우리가 걸어야 하는 이유들

나이가 들면서 몸 구석구석에서 노화현상의 증거들이 나타난다. 제일 먼저 흰머리가 늘기 시작해 염색을 해야 했고 노안이 오면서 다초점렌즈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안경을 써왔는데 어느 날부터 컴퓨터 화면의 문서는 물론 치약과 화장품 용기 등에 쓰여 있는 작은 글씨들이 보이지 않았다. 시력체크를 위해 찾은 안경점에서 안경사는 나이보다 눈은 다섯 살 정도 더 노화됐다는 말을 해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2년마다 받는 건강검진에서 추가된 진단 중에 하나는 골감소증. 칼슘제를 매일 한알씩 복용해야 한다.


코로나로 2년여 만에 이뤄진 대학 동기 모임. 한 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 내용 중, 건강 이야기가 주를 이뤄 나이 듦을 실감한다. 네 명 중 유일한 남자 동기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만보 이상을 걷고 출근한다고 말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게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두 번이나 쓰러진 경험이 있어 살기 위해 걷고 있노라며 걷기 예찬론을 펼친다.


원체 몸치라 운동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10여 년 전 큰 용기를 내 수영을 배우면서 수업을 못 따라가 주말마다 혼자 연습을 했던 기억이 있고 학창 시절에도 달리기를 비롯해 어떤 운동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음을 너무 잘 아는 탓이다. 그나마 가장 자신 있는 것은 걷기이다. 다행히 다리가 튼튼해 걷는 것은 자신이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운동화만 있으면 가능한 종목인 탓이다. 한동안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1일 만보를 목표로 인증 밴드에 가입해 매일 올리는 재미로 시간만 나면 걸었다. 점심시간을 비롯해 퇴근 후에도 시간을 할애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무더위가 찾아오면서 고비가 왔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기 시작하면서 좀처럼 집 밖을 나서기가 어려워졌고 코로나가 다시 심해지면서 면역력 운운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평소 멀리하려고 애썼던  빵, 떡 등 주전부리를 죄책감 없이 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탓에 며칠을 망설이다 체중계에 올랐다. 앞자리가 바뀐 숫자에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예측했던 결과임에도 실망스럽다. 2년여 동안 어렵게 참아온 절제의 순간들이 두 달여 동안 엉망이 되었음을 여실히 확인하는 순간이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어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대학 동기가 정성스레 만들어 보내준 수제 휴대폰 전용 가방을 메고 마스크까지 챙기면 준비 완료. 현관문에서 엘리베이터까지 몇 발자국의 경계선만 넘고 나면 일단 성공이다. 8월에 접어들면서 저녁시간에는 다행히 바람이 조금씩 분다. 집 밖으로 나온 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금세 목덜미와 등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는 무겁지만 땀을 흘린 덕분인지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요즘 외우기 시작한 김남조의 시 <너를 위하여>를 읊조리며 걷다 보니 가로수 사이로 손톱눈 같은 초승달이 눈에 들어오고 한여름의 절정을 알리는 듯 최선을 다하는 매미 울음소리도 들리기 시작한다. 한동안 더위를 핑계로 잊고 살아온 풍경들이 내 안에 천천히 스미는 순간이다. 살기 위해 걷는다는 동기의 말과 칼슘만으로는 안된다며 운동을 강조하던 의사의 진지한 표정을 떠올리며 오래간만에 밤공기를 힘껏 심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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