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 내 방식대로

by 정은숙

"우리 언제 볼까요"

"1월 4일 괜찮아요?"

"신년 밥 먹고 덕담 나누기"

그렇게 우리 셋의 신년회는 결정됐다. 밥을 먹고 영화를 볼까,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밥을 먹고 둘레길을 걸을까 하다가 보양식으로 장어구이를 먹고 족욕카페에 가는 것으로 일정을 확정했다. 새해 첫날부터 엄동설한이었던 날씨가 아침부터는 심술이 풀렸는지 살짝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집에서 15분 정도 걸려 식당에 도착했다. 예약할 때 조용한 자리를 부탁한 것이 기억에 남는지 식당 직원이 음악을 켜는 것도 안되는지 묻는다.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며 식당을 둘러본다. 오전 11시 30분, 식사하기에 이른 시각이라 손님이 없어 고요하다. 장어 2인분과 소갈빗살 1인분을 주문하고 식사를 시작한다. 부메뉴로 나온 호박범벅, 국물이 개운한 동치미, 찹쌀가루로 부쳐낸 부침개와 떡볶이가 젓가락을 멎게 한다. 멤버 중 제일 왕언니가 호박범벅과 동치미를 맛보더니 엄마맛이라며 엄지 척을 연거푸 반복한다. 맛있다는 리액션에 식당 직원도 기분이 좋은지 음식 설명을 이어간다. 초벌구이된 장어와 소갈빗살이 맛깔스러운 빛깔로 익어가고 소소한 일상을 나눈다.


그녀들과 인연은 벌써 10여 년이 넘었다. 같은 취미활동을 하면서 만났고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향,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 이뤄내는 걸 좋아하고 합리적인 생활방식까지 여러모로 꿍짝이 잘 맞다 보니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친하고 조금 특별하다고 해서 억지를 부리지도 무례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서로 도움이 되는 책이나 정보는 공유하고 새로운 일을 기획할 때는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제공한다. 더욱 관계가 돈독해진 것은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몇 년 동안 온라인으로 낭독공부를 함께 하면서다. 현직 유명 성우들에게 발성과 낭독을 배우는 동안 낭독극을 제작해 평생교육원에서 같이 공연을 했고 낭독 동아리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책을 정해 읽기도 했다. 물론 나는 후자의 경우 불량학생이었음을 인정한다.


누군가와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늘 좋은 말만 한다고 해서 그 사이가 원만한 것도 아니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아주 가까워서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도 약간의 간격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잘 안다고 해서 지나치게 간섭한다거나 내 맘대로 움직이려고 해서도 안된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적당한 틈이 있어야 바람이 통하고 잘 자란다고 한다. 물론 연인이나 부부도 서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것에 관여하거나 소유물로 여기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듯이 말이다.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고 장점은 더 크게 칭찬해 주고 부족하거나 맘에 안 드는 것들은 내 기준에 비추어 충고나 비난하기보다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아침부터 남편에게 소고기를 구었더니 고기 생각이 안 난다며 굽는 일에 더 열중하던 그녀가 후식으로 누룽지를 권유한다. 2인분을 시켜 셋이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집에서 먹는 맛보다 훨씬 부드럽고 맛있다며 그녀들이 또 한 번 엄지 척을 한다. 역시 그녀들은 리엑션 왕임에 분명하다. 부드러운 누룽지로 식사를 마무리하고 바로 옆에 있는 족욕카페로 이동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입욕제로 허브솔트를 추가 주문하고 창가 쪽에 나란히 앉아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근다.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니 세상 부러울 것도 걱정할 일도 없는 듯 편안해진다. 유리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한껏 받으며 다시 이야기꽃을 피울 무렵 주문한 차가 도착한다. 역시 식후에는 향긋한 커피가 제격.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카페라테까지 마음이 비슷한 듯 하지만 커피 취향은 제각각임을 새삼 기억한다.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같은 취미를 공유하며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나보다 더 세상 경험이 많아 더 깊은 지혜를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가끔은 너무 올곧고 외골수여서 같은 길도 에둘러 돌아가는 그녀들이 힘겨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녀들과 더 잘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걸로 치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때론 능력보다 인맥이나 관계를 통해 쉽게 살아가는 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내 길은 아님을 너무 잘 안다. 지금 이대로, 내 방식대로 다만 알아차리면서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걸어가면 될 일인 것이다. 거의 한 시간이 넘게 뜨거운 물을 자꾸 채워가며 족욕을 즐긴 후 천천히 자리를 정돈한다. 노곤했던 일주일 동안의 피로가 싹 날아간 느낌에 마음까지 훈훈해진다. 그래, 사는 일 뭐 있나.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따듯한 시간 보내며 어우렁 더우렁 살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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