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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Sep 08. 2022

방 빼는 자의 비애

이사 바구니가 도착했다

마음으로 자꾸 밀어내도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무실 앞에는 이삿짐을 쌀 때 쓰는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가 쌓여있고 청사관리 담당자와 공사업자들이 수시로 오고 간다. 공간 활용을 위해 실측을 하고 세세하게 용도를 설명하며 곳곳을 살펴보는 것이다. 촉박한 일정을 감안해 모빌렉에 보관 중인 서류를 미리 정리해달라는 요청도 함께 이뤄졌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어있고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쌓여있을 서류들을 이관하고 담는 작업도 시작됐다.


사무실 앞에 위압적인 모습으로 놓여있는 노란 바구니를 본 다른 부서 동료들이 더 궁금해하는 눈치다. 벌써 짐을 싸는 것인지 물으며 심난하겠다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어느 순간 살짝 짜증을 물고 온다. 실측을 한 번에 할 수는 없는 건가. 이사할 집 돌아보듯 교대로 와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눈길조차 배려심 없는 행동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며 근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업무처리 방식조차 서운함으로 이어진다.


오전 7시 30분. 요즘 외우고 있는 나태주 시인의 시 <사랑에 답함>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두 편을 읊조리며 사무실로 향한다. 다행스럽게 태풍을 비껴간 하늘빛이 유난히 곱고 얼굴에 스미는 적당한 바람결도 청청하다. 늘 하던 데로 사무실 앞 주차장에 주차하고 여유롭게 발길을 옮긴다. 항상 바지런한 손놀림으로 청사를 깨끗하게 만드는 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넨다.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밝은 표정으로 응대해주신다. 코로나19로 2년여 동안 폐쇄됐던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니 신문 보관대에 각 부서 직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종이 신문들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사무실 창틀에 붙어있는 업무 슬로건을 눈으로 읽으며 힘차게 문을 밀고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선다. 


하루 일정을 간략히 정리하고 모처럼 음악을 틀어 본다. 가슴 시린 발라드 음악 10선, 첫곡으로 내가 좋아하는 김필이 부르는 '다시 사랑한다면'이 흘러나온다. 계절과 잘 어울리는 정말 말 그대로 가슴 아픈 곡이라서 더 깊게 스며든다. 밥을 먹고 숨 쉬는 일처럼 익숙해진 이곳에서의 일상이 채 열흘도 남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고 나면 처음 며칠은 어색하겠지만 언제 그랬나 싶게 이내 공간도 사람도 적응하게 될 것이다. 오늘은 새로운 직장으로 옮기는 그녀와 축하 겸 이별 점심을 함께할 예정이다. 그녀의 멋진 앞날에는 축복이, 오늘 하루도 여전히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근무를 이어갈 동료들에게는 편안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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