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똘리 Oct 02. 2022

러시아인들 속 쭈굴쭈굴 불쌍한 우리

우리의 암흑기 시절


우리는 날씨가 매우 좋은 시기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의 9월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디건을 입기에 딱 알맞은 날씨였다. 미세먼지라는 건 전혀 없이 매일 같이 파란 하늘이 우리를 맞이해 줬다. 그 파란 하늘만큼 우리의 러시아 살이에도 밝은 빛이 비치면 좋으련만 러시아 생활은 역시 쉽지 않았다.


우리의 첫 트램


편은 영어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그건 러시아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에서는 그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다.


우리가 처음 주문해본 파파존스

첫 며칠은 남편 지인이 식당에 데려가 주셨다. 그러다 처음으로 둘이서 저녁을 해결해 보려고 기숙사 앞에 있는 파파존스에 들어간 날이었다. 당연히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거기에 너무 불친절해서 우린 기가 죽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뭐라도 먹어야지. 둘이 앉아 속닥속닥 메뉴를 고르다가 남편이 직원을 불렀고 구글 번역기를 열심히 돌렸다. 직원은 인상을 쓰며 핸드폰에 대고 말을 해주는 둥 마는 둥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조금 있다 피자가 무사히 나왔다. 피자가 나오기 전까진 우울했지만 피자를 보니 너무 기뻤다. 그렇게 남편이 힘들게 얻어낸 소중한 음식을 먹으며 우리의 첫 외식을 해결했다.


돈 내고 싶어요, 좀 받아주세요

기숙사비 하나 내는 것도 우리에겐 힘든 일이었다. 뭘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매번 구글 번역기를 켜서 둘이 멋쩍은 불쌍한 미소를 띠며 상대방에게 여기에다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러시아에서 기숙사비를 내는 건 그냥 돈을 내면 끝이 아니다. 학교 건물이랑 기숙사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여기서 도장받고 저기서 도장을 받아 승인이 되면 또 뭐가 필요했다. 그렇게 쭈굴거리며 다니다가 어느 하루 말이 통해서 하하호호 웃으며 기분 좋게 일이 끝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사람 데려오세요!

하루는 번역 공증을 받아야 해서 어떤 개인 사무소를 찾아갔다. 거기서도 역시 우리는 번역기를 돌려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 직원은 바로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사람 데려오세요!"라고 짜증을 내며 거의 우리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냥 문 밖으로 나왔고 어쩔 수 없이 지인 찬스를 써야 했다. 다시 또 우울해지는 날이었다.


가장 무서운 러시아 은행 가기

러시아의 마트, 미용실, 여러 곳 중 은행은 제일 무섭고 가기 싫은 곳 중 하나이다. 우리나라처럼 웃으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없고 다 무뚝뚝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못 알아들으면 아주 짜증을 낸다. (그나마 학교 근처 은행은 우리 같은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가서 친절했다) 그러니 은행은 갈 때마다 심장이 두근댔다.


하루는 남편이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언제 우리 차례가 되는 거야' 하며 기다리는데 우리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내 마음도 그랬다. 한국에 있을 땐 뭐든지 척척 해내는 당당한 남편이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안쓰러우면서 우리의 모습이 웃겼다.


한국에서는 별 일 아닌, 뇌를 거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뇌를 풀가동해 마음 졸여가며 남편과 같이 하나씩 뭔가를 해결해 나가는 게 미션을 하나씩 수행하는 것 같았다. 해외에 살아서 힘들었지만 해외에 살았기에 느낄 수 있는 희열과 성취감이 있었다.




이전 04화 거대한 땅 위, 단칸방 기숙사 신혼생활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남편과 친해지기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