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놀래키기 3단 콤보
그냥 축하해줄 순 없는 거야?
내 결정을 듣는 사람마다 다 놀랬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나 같아도 내 친구가 갑자기 결혼해서 한국을 떠난다고 하면 무척 놀랄 것이다. 심지어 내가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들은 더 놀랬다. 처음엔 이런 폭탄선언을 하는 게 두근거리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기도 했다. 해외 가서 좋겠다고, 결혼 축하한다고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가끔은 축하보다 놀람과 걱정 섞인 리액션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결혼을 왜 이렇게 빨리해?
지금 꼭 러시아를 가야 돼?
결혼 나중에 해도 되잖아?
러시아 가서 뭐하게?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그럴 때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놀랄 일이긴 하지만 그냥 내가 결정한 길을 잘 가라고 기분 좋게 축하해 줄 순 없는 걸까? 내가 남들에게 알린 건 내가 혼자 생각하고 결정을 다 끝낸 후였으니 당연히 사람들에겐 갑작스러운 결정이라고 느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빨리 후다닥 결정하지 않았다. 나도 충분히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인생은 타이밍이다.
완벽한 타이밍
살다 보니 타이밍이란 건 참 중요하다. 만약 내가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신입이었다면? 원하던 곳으로 이직해서 내 일을 포기하기 너무 아까웠다면?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좋아서 다른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러시아에 안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새로운 환경이 너무 필요했다. 매일 똑같은 생활에 지쳤고, 회사에 다니는 것도 그다지 재미가 없었고, 매일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자꾸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인 듯한 느낌이 들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 넓은 세상이 단순히 공간적으로 넓은 세상인지, 내가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넓은 세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내 세계가 좁다고 느껴져서 답답했다. 아무튼 결혼해서 러시아행은 '이 회사를 나가고 싶다.. 나가고 싶다' 하던 이 타이밍에 훅 들어온 남편의 제안이었다. 그렇다고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인 건 절대 아니다. 내 커리어가 너무 눈에 밟혔으니까.
당장 내일의 나도 모르겠는 나
나는 주변 친구들이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고민할 게 없었다. 대학교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나는 평생 개발자로 일하며 살겠지라고 생각했고, 취업을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헤매진 않았다. 내가 정한 길이 있었으니까. 회사 다니기 싫다고 해도 나는 계속 직장 생활을 하며 살겠지 생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러시아로 가기로 결정한 날부터 나는 내 미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러시아를 가기로 결정한 건 가서도 컴퓨터공학과 석사로 들어가 계속 내 커리어를 지키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삶을 내려놓고 내 평생 관심도 없던 러시아라는 나라를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당장 내일의 나는 무얼 하고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어 공부는 하고 있어?
이제 모든 게 정리가 되고 러시아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가족들, 친구들이 물었다. "러시아어 공부는 하고 있어?". 하긴 했다. 남편이랑 책을 사서 보고 나름 인터넷 강의도 듣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정말 우리는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 대책 없는 상태로 둘이서 러시아에 도착한 건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그렇게 말 한마디 못 알아들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무슨 용기로 러시아에 갔을까. '그냥 하면 되겠지 뭐'라는 무책임한 생각으로 갔나 보다. 그리고 이 언어 하나가 삶의 질을 확 떨어뜨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