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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Mar 17. 2023

화신花信

꽃이 핀 것을 알리는 소식 

얘야, 바람이 마이 따숩제. 얼었던 땅이 녹아 흙 속에 살던 생명이 꼼지락거리는구나. 간지럽데이. 부드러워진 흙은 식물의 뿌리를 깨우네. 물오르는 소리가 힘차다. 바위 뒤 옹색한 곳에서도 참꽃은 꽃망울 터트리며 봄을 알리네. 진달래꽃, 두견화라 불리는 참꽃은 온산에 천지삐까리구먼.


 니는 어릴 적 참꽃을 억쑤로 좋아했꾸마. 꽃잎을 따서 흙에 버무려 밥을 지어 입맛을 다시며 잘 놀았제. 꽃밥을 먹다가 사레들린 듯 켁켁거리면 내는 얼른 두레박으로 물을 길렀지. 그러면 니는 실제 목이 말라 기다린 것처럼 들이켰구먼. 니 주변에는 꽃물 든 사금파리들이 늘 오종종하게 모여 있었어. 


 연분홍 연한 맨살로 얼굴 내민 참꽃, 실은 내 같은 무지렁이의 가슴도 설레게 하던 꽃이었지.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다가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을 발견하면 먼저 꽃잎을 쓰윽 만져보았제. 투박한 손길에 화들짝 놀란 꽃들이 숨을 멈추고 내를 뚫어지라 쳐다보는 듯한 상상에 얼굴이 붉어지고 화끈거렸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무이’하고 불러본 기억이 없는 내게 어무이 품은 아마도 꽃 더미 속 같지 않을까 싶었어. 내는 돌이 되기도 전에 서름구디로 내쳐졌꾸먼. 그렇기에 꽃에 맴을 붙들어둔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현실이었지. 니가 좋아하는 걸 알면서 내도 덩달아 꽃에 취해보니 꽃 멀미로 맴이 빙그르르 돌았제.


 니는 삽작끌까지 달려와 집채만 한 나뭇짐을 지고 온 내를 반기었지. 니 관심은 내가 아닌 딴 데 있었지만 신내끼도 서운하지 않았제. 깊은 산중, 마른 이끼 낀 바위를 오르다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니를 생각하며 아픈 줄 몰랐어. 심지어 낭떠러지 비탈에 핀 꽃에 시선을 빼앗겨도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않았거든. 신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헌화가를 니가 이야기했을 때, 내는 생각했꾸먼. 니는 수로부인이고 내는 노옹이 되어 세월을 건너왔다고. 절벽에 피어있던 그 꽃은 봄이 오면 부끄러운 듯 연한 속살을 드러내곤 했제. 


 니는 나뭇짐에 꽂힌 꽃을 보며 손뼉을 쳤제. 내는 꽃가지를 나뭇짐 속이 아닌 겉에 두었구먼. 행여나 니가 꽃을 찾겠다고 나뭇짐을 들쑤시다가 도깨비바늘에라도 찔릴까 봐 그랬제. 동네 사람들은 내를 비웃었어. 허구한 날 저리 꽃가지만 항거석 짊어지고 오면 울 초가집 굴뚝에 연기가 날랑가 모르겠다면서. 니는 지게작대기로 공가 놓은 나뭇짐 둘레를 맴돌며 꽃잎을 따서 먹었지. 어느새 작은 몸 구석구석에는 꽃 향기가 배어 니가 뛰댕기는 마당귀마다 꽃물이 떨어졌제. 


 봄이 오면 니를 앉혀놓고 내가 자꼬 이바구하던 게 있었데이. 산에는 참꽃을 꺾는 얼라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문디가 숨어 산다고. 그런데 니는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안골 사는 한동개비 영희랑 뒷산에 들어갔다가 제때 나오지 못해 시껍했제. 어른들도 깊은 산이라 쉬이 접근 못 하는 구봉산에 겁 없이 갔더구나. 실은 나물 캐러 갔다고. 밭두렁 논두렁에 빼죽이 올라온 쑥이며 달래며 씀바귀는 뒷전이고 꽃의 붉은 기운에 이끌려 얼차메 달려갔다고. 헌 대수꾸리는 산언저리 뽕나무 아래 잘 숭가 두고 말이다.


 산 만대이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서야 제정신을 차렸다는 너들은 대수꾸리를 찾지 못하여 울었제. 그 울음은 메아리 되어 산을 흔들었꾸먼. 이 산 저 산 울러 퍼졌어. 잘 기억해둔 산뽕나무와 비슷한 나무들이 구봉산에는 많고, 이 사실을 알기에는 너들이 너무 어린 나이였지. 녹슨 칼 하나도, 댓살이 닳아 구멍이 난 대수꾸리도 집안의 귀한 재산목록이었던 시절에 이걸 잃어버렸으니 맴이 어찌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어. 온 산을 헤매고 나서도 찾지 못한 것을 며칠 후 내가 가져왔제. 니 말을 들어보니 그 산뽕나무의 위치를 내는 대충 가늠할 수 있었꾸먼. 이 아부지가 나무꾼이 아니었더냐.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졌데이. 니를 발견하고 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꾸마. 머리는 쑤시방티가 되고, 입쑤부리는 푸르뎅뎅하고, 무릎은 까지고…. 심지어 고무신 한 짝은 찢어져 있었제. 이 와중에 눈부신 게 하나 있었는데 니는 아나. 조막만한 얼굴을 가리며 니가 꽃물 든 손으로 한뭉티 안고 있는 참꽃이었꾸먼.


 온 산은 붉은 꽃빛으로 물이 든다. 오늘은 눈치 채지 못하게 니한테로 다가가 꽃이 핀 것을 알리는 소식, 화신花信을 전한다. 

“아부지, 바람처럼 새처럼 훨훨 날아 좋은 데로 가시우.”


 니 울부짖음을 내는 온전히 붙들고 있데이. 바람이 되어, 새가 되어 허공에서 니를 바라본 세월이 십 년인가. 내게는 찰나에 불과한데. 맴이 여린 울 꼬맹이, 삶의 모서리마다 마음을 다치고 난 후 눅눅한 심기가 여즉 남아 있을까 봐 걱정이네. 혹여 그렇다면 그 마음 한 줌 꺼내어 따순 봄빛에 퍼뜩 말리거라. 그라고 바위가 부스러져 갓 흙이 된 척박하고 건조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참꽃처럼 강인하게 살거라. 


 내는 니 게작은 곳에 늘 있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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