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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Mar 17. 2023

연화지의 품

연꽃들 틈에 뒤늦게 피는 백련처럼 수수하게 살고 싶다

 지는 연꽃을 본다. 꽃잎에 기미가 끼고 연꽃 안쪽에 씨방이 보인다. 성질 급한 꽃들에서는 초록 연자가 뜨거운 햇볕에 이미 익어가고 있다. 축 늘어진 홍련 꽃잎들 사이로 백련 한 송이가 수줍게 피어오른다. 맑은 빛깔로 꽃잎을 고요히 연다. 


 우리나라에는 수려한 연꽃 군락지가 많다. 한결같이 자연과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진 곳이다. 연꽃밭에 들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특히나 연화지에서는 더 그렇다. 연화지는 경북 김천시 교동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 경부고속도로 김천 IC를 나와 한달음에 달려가면 만나는 연화지, 이곳에는 지금도 전설이 간간이 이어진다. 


 연화지는 조선 시대 농업용수 관개지로 조성된 저수지였다. 김산*군수 윤택이 솔개가 봉황새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연못을 솔개연(鳶)에 바뀔 화(嘩)를 써서 연화지鳶嘩池라 이름 지었다. 가운데에는 봉황대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으며 물 위에 떠 있는 정원처럼 몽환적이다. 상공에서 연화지를 바라보면 영락없는 둥근 알이다. 연화지의 둘레는 계란형이며 중심에는 노른자 같은 봉황대가 자리한다. 


 여인이 두 팔 벌려 끌어안으면 그 품에서 금방이라도 봉황이 날개를 펼 것 같은 상상에 빠진다. 하늘로 올라가는 봉황의 날갯짓 따라 천상의 소리가 들린다. 아픔이 없는 맑은 울림이다. 햇살을 안고 퍼지는 울림은 못물에 여울진다. 윤슬 위에 핀 연꽃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매료된 사람이 오래전부터 많았다.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도 그중 한 사람이다. 조선 성종 때 시인 묵객으로 봉황대에 올라 노래했다. 


 ‘금릉 아름다운 땅, 맑은 물결이 일렁이네, 물속에 비단 비늘이 가득하고 바람에 수양버들이 나부낀다, 푸른 것은 삼 만개의 연잎이요 붉은 것은 열 길의 연꽃이네, 좋은 경치를 감상함은 내 분수가 아니니 떠나는 수레 타고 이곳을 지난다.’ 유호인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종직은 1482년 관직에서 물러나고 연화지 인근에 있는 배천 마을에 낙향하여 서당 경렴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한 적이 있다. 이때 유호인이 김종직을 만나 함께 시연을 열며 지은 시로 풀이된다. 삼산이수의 고장, 금릉은 김천의 별호였다. 


 김천 연화지는 야경 벚꽃의 명소로도 이름나 있다. 벚꽃풍경은 작지만, 아름다움이 꽉 들어차 풍요롭다. 곡선의 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달빛 들어찬 물 위에 꽃잎이 하나둘 열리고 고요함이 시끄러움을 잠재운다. 환상적인 데칼코마니가 펼쳐진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는 사람들을 두 팔 벌려 품는 연화지, 그 안에서 사람과 자연이 하나 되는 그림이 그려진다. 물감을 덧칠하지 않아도 채색이 고운 수채화다. 우주 만물이 생동하는 봄으로 물든다. 


 그 옛날 풍류객들의 감흥을 일깨우던 연화지가 이제는 지난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넉넉한 품이 되었다. 그 품에 들면 생명의 본향인 어머니의 젖줄을 만난다. 연화지, 새 생명의 발원지다. 

 인생의 늦은 오후로 접어든 나, 봄날의 벚꽃 같은 화려함은 아니어도 연꽃들 틈에 뒤늦게 피는 백련처럼 수수하게 살고 싶다.


*김산: 김천은 신라 시대부터 김산현으로 행정구역이 정해졌다가 1914년에 김천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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