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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Mar 17. 2023

모시옷 한 벌

지난한 노동의 결이 옷 속에 잠든 바람을 깨운다

바람의 옷이다. 결이 고운 천에 바람이 집을 짓고 산 지 오래다. *유왕산 상상봉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건너온 바람이다. 먼 길 달려오느라 지쳤음에도 세상 문턱에서 넘어지지 않고 용케 모여드는 바람의 식구다. 내내 그리웠다고 이들을 얼싸안은 옷은 주름살을 펴고 환하게 웃는다. 뜨겁게 달궈진 태양도 옷자락에 기대어 몸을 식힌다. 어느새 옷 속에 잠이 든 바람, 만물은 일제히 쉿.


 카랑카랑한 소리가 날 만큼 빳빳하게 푸새하여 다려 입고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린다. 옷맵시가 깨끔하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듣는다. 나이 드신 분들은 딱 봐도 흐늘거리는 중국산이 아니라며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만져본다. 묵을수록 더 빛나는 게 우리 옷, 특히 모시옷이라며 한 마디씩 거든다. 


 모시옷을 입을 때는 평상시와는 사뭇 다르다. 속바지와 속치마, 속적삼을 갖춰 입는다. 구겨질까 다소곳하게 앉는 것은 기본이다. 다리를 벌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며 머리도 흐트러지지 않게 단정히 뒤로 묶는다. 신발에서는 꽃신의 고운 선과 오뚝한 콧날은 없어도 투박한 나막신의 멋이 있어야 매력적이다. 가방은 또 어떠하랴, 밀짚이나 왕골로 된 것이어야 제격이다. 어느 산골 마을의 촌부가 짠 것이면 더 좋다.


 가뿐하다. 잠자리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걸음걸이는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입어본 사람만이 안다. 바빠도 바쁘지 않은 척 여유롭게 사뿐사뿐 발걸음을 뗀다.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몸의 중심을 곧게 잡는다. 몸이 흔들리면 경망스럽다. 가슴을 너무 열어도 아니 되고 고개를 숙이거나 높이 들어도 아니 되는 자태를 요구한다. 자고로 나는 왕조 시대의 기품 있는 양반집 마나님이 되어 저절로 우아함이 더해진다. 여기에 합죽선 하나 들고 배롱나무 그늘에 서면 동양화 한 점 걸린다. 나만의 모시옷 예절이자 예찬이다.


 내가 입은 옷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귀한 모시로 지었다. 시어머님이 직접 골방에서 베틀로 짠 것이다. 모시풀을 재배하여 수확하면 먼저 잎을 훑고 껍질을 벗겨 원재료인 태모시를 만든다. 이것을 물에 담갔다가 빛이 바랜 다음 윗니와 아랫니로 모시 속껍질을 물어 올을 쪼갠다. 다시 한 가닥씩 빼 양쪽 끝을 무릎 위에서 침질하고 손바닥으로 비며 연결한다. 여기까지의 공정은 내가 결혼한 후에도 어머님이 직접 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모시 째기를 하는 동안 이가 깨지면서 골이 파였다. 어떤 방면에 길이 들여져서 버릇처럼 아주 익숙해지는 일을 말하는 ‘이골이 나다’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또한, 모시를 삼느라 비빈 무릎은 늘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시 짜기는 습도가 낮으면 끊어지기 쉬우므로 마루 밑을 토끼 굴처럼 파서 골방을 만들었다. 그 안에 베틀 하나를 겨우 들여놓았다. 밤이면 베틀에 올랐던 어머님, 새벽닭이 울고서야 베틀에서 내려왔다. 남편은 회상한다. 밤중에 깨어나 마당으로 내려서면 사방은 고요하고 으슥한데 딸각딸각, 베틀 소리에 무서움을 몰랐다며. 집 앞 개울의 물줄기를 따라가면 한산의 들판이 펼쳐진다.


 어머님은 어릴 때부터 학교 문턱을 넘어야 할 걸음을 모시밭으로 옮겼다. 일 년에 세 번 수확하는 모시풀이기에 쉴 틈이 없었다.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모시의 일련 과정을 스스로 배웠고 일찌감치 베틀에 앉았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허리 곧추세우고 베틀에 앉은 세월은 시집오고 나서도 이어졌다.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다루기 쉬운 여러 직물이 쏟아져 나왔다. 여인의 손길 사백 번을 거쳐야 한필이 나온다던 모시는 당연히 뒤로 밀렸다. 베틀은 골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갇히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곧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어머님의 모시 짜는 솜씨는 정교했으며 속도도 빨랐다고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베틀만 잘 지켰더라면 한산모시 짜기 기능보유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님의 재주가 세상에서 더는 빛을 보지 못하고 가뭇없이 지워지는 게 아쉽다. 


 이마저도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한산 장에 내다 팔지 않은 모시 한 필이 있었다. 어머님은 큰맘 먹고 아버님께 두루마기를 해드렸다. 아버님이 급성 충수염에 걸려 수술한 후다. 어머님의 온전한 모시 역사는 이 두루마기에만 남았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두루마기를 리폼 하여 내 옷을 만들었다. 배래의 곡선미는 웃옷 소매에서 살리고 긴 고름으로는 허릿단을 단단하게 하였다. 치맛단을 넓게 하여 주름이 잡히게도 했다. 천 조각을 잇다 보니 투피스는 박음질이 많았다. 옷은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씨줄과 날줄이 틀어졌다. 그래도 언뜻 보면 비틀어진 모양새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갓 지은 새 옷처럼 곱다. 모시옷 한 벌에는 땀방울의 결정체인 어머님의 정성과 수고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여민 연봉매듭이 있다. 


 푸새하여 다림질한다. 모시 한 필을 만드는데 여인의 침 석 되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되새기며 손목에 힘을 준다. 남편은 슬쩍 옷을 만져보며 어머님께 전화를 드린다. 윤오월 보름날, 아버님 산소도 살필 겸 시골에 내려간다고. 바빠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지며 오이며 호박이며 고추가 실해졌는지 보느라 수시로 텃밭에 나가며 굽은 허리를 펴지 못하리라. 골목길이 한눈에 보이는 마당귀에서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쭉 빼며 삽짝거리를 연신 내다볼 것이다. 고단하여도 자식 앞에서는 절대 무너지지 않고 푸새한 모시옷처럼 꼿꼿하게 버티는 것만이 부모의 자존이라 여기는 어머님. 


 힘주어 짜놓은 어머님의 지난한 노동의 결이 옷 속에 잠들어 있는 바람을 깨운다. 바람이 기지개를 켠다.


*유왕산: 당나라로 끌려가던 의자왕 일행을 백제유민들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전송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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