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지만 따뜻해 #2
할머니 유품을 정리하던 중 낡은 레시피 노트를 발견했다. 파란색 비닐 표지에 '우리집 요리'라고 할머니 손글씨로 쓰여있었다. 펼쳐보니 된장찌개, 김치찌개, 잡채, 불고기... 익숙한 요리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할머니 요리는 늘 맛있었다.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유독 할머니가 끓인 국은 깊은 맛이 났다.
앞에서부터 천천히 넘겨봤다. 1978년에 시작한 노트였다. 초반에는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시어머니께 배운 미역국', '큰언니가 알려준 갈비찜'. 중간쯤 가니 글씨가 단정해졌다. '큰애가 좋아하는 계란말이', '둘째가 먹는 약식'. 후반부로 갈수록 글씨가 다시 흐트러졌다. 손이 떨렸던 걸까.
그런데 마지막 장에는 이상한 레시피가 있었다. 다른 요리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후회 수프 - 재료: 하지 못한 말 한 줌, 보내지 못한 편지 세 장, 울지 못한 눈물 반 컵, 끝내지 못한 사랑 적당량, 참았던 웃음 두 스푼, 삼켰던 분노 한 자밤. 조리법: 모든 재료를 가슴 깊은 곳에서 천천히 끓인다. 절대 다른 사람과 나눠 먹지 말 것. 혼자 다 먹어야 소화가 된다. 주의사항: 이 수프는 평생 먹게 된다. 불을 끄고 싶어도 끌 수 없다. 재료가 다 녹을 때까지 계속 끓는다.'
그 아래 할머니 필체로 세세한 메모가 적혀있었다. '1967년 봄, 기차역에서 하지 못한 말 - 사랑한다는 말 대신 잘 가라고 했다' '1983년 여름, 쓰다가 찢어버린 편지 - 친정어머니께 보내려던 편지. 보고 싶다고 쓰다가 찢었다. 며느리가 그리워한다고 하면 시어머니가 뭐라 하실까봐' '2001년 겨울, 참았던 눈물 - 큰아들 장례식. 며느리랑 손주들 앞에서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노트를 덮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할머니는 늘 웃으셨다.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괜찮아, 다 괜찮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 노트를 보니 할머니도 평생 당신만의 후회 수프를 끓이며 사셨구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드셨구나.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마지막 메모가 있었다. '2019년 가을, 막내 손주에게 - 이 노트를 네가 발견했다면, 할머니는 이미 없을 거야. 할머니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야. 너는 후회 수프를 끓이지 마라. 하고 싶은 말은 하고, 보고 싶으면 보고, 울고 싶으면 울어라. 할머니처럼 참다가 인생 다 가지 마라. 사랑한다. - 할머니가'
나는 그제야 울었다. 노트를 꼭 안고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 저도 사랑해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 사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