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특집 #4] 아버지가 쓰다 만 일기장

이상하지만 따뜻해 #4

by 사우스파크

아버지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우연히 낡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검은색 양장본이었다. 표지에 '1989-1991'이라고 적혀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펼쳐도 될까 망설였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첫 페이지. '1989년 5월 3일. 오늘 청혼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준비한 반지도 없이 그냥 무릎 꿇었다. 그녀가 울면서 좋다고 했다. 나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술 먹고 집에 와서 소리 지르고 물건 던지던 아버지.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페이지들을 넘겼다. '1989년 7월 15일. 결혼식 날짜 잡았다. 11월 3일. 준비할 게 산더미다. 돈은 없고. 그래도 행복하다.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다는 게.' '1989년 10월 1일. 신혼집 계약했다. 작은 투룸. 전세금 마련하느라 부모님께 머리 숙였다. 빨리 갚아야지.'


'1990년 1월 12일. 아내가 임신했다. 병원에서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섭다. 나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내 어린 시절은 너무 불행했다. 아버지는 매일 술 먹고 들어와 어머니를 때렸다. 나는 방에 숨어 귀를 막았다. 내 아이는 절대 그런 기억을 갖게 하지 않겠다. 내 아이는 웃게 해주고 싶다. 매일 웃게.'


페이지가 진행될수록 글씨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1990년 4월 3일. 회사에서 야근이 많아졌다. 집에 오면 아내가 자고 있다. 미안하다. 배가 불러오는데 혼자 두고. 주말에는 꼭 어디 가자.' '1990년 6월 20일.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했다. 병원에 갔다. 괜찮다고 하는데 밤새 걱정했다. 제발 무사히 태어나라.'


'1991년 7월 5일. 오늘 아들이 태어났다. 3.2kg. 처음 안아봤는데 눈물이 났다. 이렇게 작은 생명이 나를 믿고 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 아이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전부 주고 싶다. 아들아, 아빠가 최선을 다할게.'


'1991년 8월 10일. 첫 월급으로 분유 샀다. 아내가 모유가 부족하다고. 아내도 챙기고 아이도 챙기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행복하다. 정말 행복하다. 우리 아들이 웃었다. 아직 잘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나를 보고 웃었다.'


'1991년 10월 15일. 야근이 너무 많다. 아들 얼굴 보기 힘들다. 아침에 나갈 때는 자고 있고 밤에 들어오면 또 자고 있고. 주말에 많이 안아줘야지. 일기 쓸 시간도 없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일기는 없었다. 빈 페이지만 계속됐다. 아버지는 나를 키우느라 자신의 이야기를 쓸 시간이 없었던 거다. 일기는 멈췄지만 인생은 계속됐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매일을 살았던 거다.


나는 마지막 빈 페이지에 펜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썼다. '2025년 12월 13일. 아버지의 아들이 씁니다. 아빠, 저 행복했어요. 아빠가 원했던 대로 웃으며 자랐어요. 아빠가 얼마나 저를 사랑했는지 이제야 알겠어요. 말 한 번 없이 묵묵히 일하시던 아빠. 제 학원비 대려고 점심 거르시던 아빠. 제가 대학 갈 때 혼자 우시던 아빠. 저는 몰랐어요. 아빠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아빠, 사랑해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 아빠의 아들이'


일기장을 덮고 아버지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다. "아빠." "왜?" "나... 행복했어요. 정말로." 아버지가 신문을 내리며 나를 봤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요. 말하고 싶었어요. 아빠 덕분에 행복했다고."


아버지 눈가가 붉어졌다. "그래... 그랬으면 됐다." 아버지가 작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안았다. 아버지도 나를 안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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