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제의 고민은 배송만 늦출 뿐
어젯밤 9시가 넘어가는 찰나에 아주 재빠르게 10만 원 결제를 해버렸다. 몇 날 며칠을 고민했는데 결제의 순간은 짧기도 하다.
월 말이고 이미 생활비를 다 써버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오늘이 지나면 못 산다는 생각에 10만 원이나 되는 애들 옷을 사버린 것이다. 생활비를 조금씩 조금씩 모아둔 돈으로 이번달 카드값을 채워야 할 판이다.
이게 다 인스타 때문이다. 괜히 인스타를 켰다. 괜히 그 피드를 봤다. 괜히 인스타를 깔았다. 다 내 잘못이다.
인스타는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딱 그날만 최저가로 오픈한다는 콘셉트로 나 같은 소비자를 혹하게 만들고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불안 심리를 이용해 사버리게 하는 아주 교활한 쇼핑매체다.
그걸 알면서도 못 끊는 나는 호갱이다.
호갱이 안되려면 인스타를 지워버리면 된다. 그럼 간단해진다. 그런데 왜 못 지우냐.
인스타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있다. 교육에 관련된 것. 여행에 관련된 것. 요리에 관련된 것. 그리고 쇼핑에 관련된 것. 심지어 아이 머리를 예쁘게 묶는 법까지.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를 찰떡같이 알아내고 그 관련된 피드를 내가 살 때까지 노출시킨다.
며칠 전에 변기세정제를 쿠팡에 검색했더니 인스타에서 바로 온갖 종류의 세정제란 세정제는 다 광고로 떴다.
겨울에 여행을 가려고 네이버에 발리 항공권을 검색했더니 인스타에서 바로 발리 관련된 호텔이나 숙박 업체가 광고로 떴다.
내가 검색하는 족족 인스타에서 광고로 뜨니 이 정도면 무섭기도 하지만 유용하기도 하다.
한동안 검색을 인스타로 한 적도 있으니. 나도 인스타를 잘 이용하고 있긴 하다.
그래서 인스타를 못 지우는 한심한 나다.
갑자기 인스타 이야기로 넘어와 당황스럽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내용은 쇼핑에 관해서다.
인프제인 나는 쇼핑할 때 엄청 많이 고민하는 편이다. 물론 즉흥적으로 살 때도 있지만 보통은 꽤 고심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예전 남편과 연애 때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도 매장마다 다 둘러보고 입어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후보를 고른 후 다시 입어보고 사곤 했다.
신발을 살 때도 그랬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살 때도 다 둘러본 후에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샀다. 결혼식장도 그렇게 골랐으며 가전, 식기도 여러 군데를 다 둘러본 후 최종적으로 다시 보고 샀다. 남편이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꽤나 피곤했을 거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내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 지금은 많이 단축되었지만 여전히 그런 성향은 남아있다. 음식점을 가도 쭉 한번 둘러본 후 정하고 쇼핑몰에서 아이 옷을 살 때도 이곳저곳 둘러본 후 한 번 입혀보고 결정한다.
사실 나는 혼자 쇼핑하는 게 편하다. 누군가 내 쇼핑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나는 충분히 꼼꼼히 시간을 들여 보고 싶은데 누군가 있으면 눈치 보며 서두르게 된다.
또 점원이 없는 곳을 선호한다. 나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옆에서 이것저것 거드는 점원이 있으면 그냥 나와버린다. 그래서 요즘에는 쇼핑몰에 가면 남편이 아이들을 보고 나 혼자 쓱 둘러본 다음 최종적으로 살 때 아이와 같이 다시 온 후 입혀보거나 신겨본 후 결정한다. 그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다.
인터넷으로 살 때도 마찬가지다. 여러 군데를 비교한 후 링크를 저장한 후에 후기를 꼭 보고 결정한다.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살 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나에게 결정장애가 있어서다.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한 가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바로 사지 못한다. 내가 봐도 너무나 피곤한 스타일. 하지만 이렇게 해서 사야 후회가 없다. 비록 후회를 하더라도 온전히 내 몫이기에 누굴 탓할 수 없다.
이런 나의 결정장애 성향을 우리 큰 아이가 빼다 닮았다. 그래서 무엇하나 쉽게 고르지 못한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조차 10분 이상은 걸릴 거다. 하지만 날 닮아서 그런 걸 어쩌랴. 조금씩 푸시하면서 이것저것 권해보면서 빨리 골라주길 기다릴 수밖에.
반면에 둘째 아이는 아빠를 닮은 건지 미스터리지만 너무 쉽게 골라 문제다. 이게 진짜 마음에 들어서 고르는 건지 그냥 눈앞에 있어서 고르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고르는 거 같다.
나나 큰 아이나 무언가 사고 싶거나 먹고 싶거나 가고 싶거나 하나에 꽂히게 되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꼭 가는 편이다. 나는 노래는 안 부르지만 큰아이는 노래를 부른다. 먹을 때까지 혹은 가고 싶을 때까지. 사실 나도 어렸을 때 노래 꽤나 불러댔다. 지금은 어른이고 내가 결정할 수 있고 사고 싶은걸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른의 특혜라 볼 수 있다.
어제의 쇼핑도 마찬가지다. 생활비 오버로 사실 사면 안 되는 거지만 어른의 특혜로 지른 것이다. 고민은 배송만 늦춰질 뿐 어차피 살 거 빨리 사자라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현혹되 기기 쉬운 편이라 조금의 과장 광고에도 혹하고 잘 넘어간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요즘 화장품 광고에도 잘 현혹된다. 기미며 주름이며 과장 광고라는 걸 알면서도 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100% 믿지는 않지만 ‘설마 선량한 사람에게 사기는 치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번 사보는 거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라는 말처럼 정말 효과가 미미한 경우가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양제부터 다이어트 효소, 기능성 레깅스, 눈 운동 기기까지 그러고 보니 나 정말 호갱이 맞나 보다. 나 같은 사람들 덕분에 너 님들이 먹고사는 거구나…
그런데 어떡하나. 안 사면 눈앞에 자꾸 아른거리는 것을. 인프제들은 알 것이다. 자려고 누우면 사고 싶은 것들이 눈앞에 아른거려 잠을 잘 수가 없다. 살 때까지 계속 생각난다. 나만의 쇼핑목록을 만들어 저장한 후 언젠가 결국 사게 된다. 먹게 된다. 가게 된다. 하게 된다. 어차피 살 거 빨리 사는 게 1분이라도 더 일찍 잠잘 수 있는 기회다. 9999개의 고민 중 한 개를 더는 거다. 핑계를 대자면 어제의 쇼핑도 자기 합리화를 하며 산 것이다. 사고 나니 후련하긴 하다. 카드값 걱정은 다음 달에 하는 걸로…
인프제인 나는 쇼핑에 이렇다.
- 결정장애가 있어 쉽게 고르지 못한다.
- 무엇이든 고민하고 비교한 후 신중하게 쇼핑한다.
- 무언가를 살 때 시간이 많이 걸린다.
- 혼자 쇼핑하는 것이 편하다.
-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어차피 사게 된다.
- 사람을 잘 믿어 호갱이 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