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conut Nov 08. 2021

마늘

"이 우오 우어아!! 어어!!" (집 주소 불러라! 어서!)

"정만 괜찮아요 어르신 마음만 받을게요"

"아 어으며 아 가다!" (안 적으면 안 간다!)

결국 내 집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처음으로 환자에게 주었다.


자글자글 한 주름, 구릿빛을 넘어선 피부, 가까이 가면 흙냄새가 날 것 같은 옷차림.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5월. 할아버지의 첫인상은 누가 봐도 농사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설암 (혀에 생긴 암) 수술을 받기 위해 경상남도 남해에서부터 올라와 입원하고

그때가 1년 차 5월이었으니 아직까지 제대로 하는 게 별로 없었고 아무래도 환자와 대화하는 것도 어설프고,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급급하던 시절이다.

그래도 아직 신입의 열정과 패기는 남아있어서 환자 파악을 잘하고 싶고 좋은 라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다.


나의 바람과 다르게 할아버지는 쿨내가 진동하였는데

"환자분 하루에 담배를 몇 갑씩, 몇 년을 폈는지 알려주세요."

"2갑 50년!!"

이렇게 짧게 짧게 대답하는 식이었고 친해지긴 어렵겠다 생각했다.

다음 날 수술실에 들어가서 보니 생각보다 종양의 크기가 커서 수술 전에 설명했던 것보다 혀를 많이 절제하게 되었고 성공적으로 종양은 제거하였으나 앞으로 재발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였다.


앞으로 주치의인 나의 업무는 수술부위 확인, 소독, 통증 등등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확인하는 것인데 얼마나 어설펐겠는가.

뭘 하나 하려고 해도 허둥지둥 혼자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니 새벽부터 파란색 유니폼은 이미 땀으로 짙게 변하고

선배들만 보면 90도로 폴더폰 인사를 하고

심심치 않게 하루에 몇 번 씩이나 두 손 모으고 고개는 선배의 신발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반성 자세를 잡고 죄송합니다를 외쳤으니.


이렇게 주치의가 신입이고 어설퍼 보이면 환자와 보호자는 괜히 나에게 실수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눈을 날카롭게 뜨고 잘하나 못하나 지켜본다.

그리고 불편한 점이나 궁금한 사항은 나한테는 없다고 하지만 교수님만 보면 쪼르르 달려가서 말을 한다.

그러면 교수님은 친절히 대답해주고 나서 "고선생은 환자를 안보나?" 하고 가신다.

그러면 그때부터 다시 선배들의 폭풍 내림 공격이 시작된다.


그래도 할아버지만큼은 나를 믿어주셨다.

혀를 수술해서 발음이 어눌해져서 "하아도 아나하다!" 하고 외쳤다.

지금이야 다 알아듣지만 이 때는 나도 어눌한 발음을 잘 못 알아들어서 네? 네? 하면

몇 번 반복해서 소리 지르시다 수첩에 뭔가 적어서 부욱 찢어 주고는 쿨하게 뒤돌아서 갈 길을 가셨다.

종이에는 '안 아파'라고 적혀있었다.

누가 봐도 아플 텐데...

그리고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되는 걸 아셨는지 궁금하거나 불편한 점도 다 내게 말하고 (결국 종이에 적었지만) 교수님께는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10일 정도 입원 후 수술 부위가 회복되었고 항암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하고 퇴원을 하였다.

(병원을 돌아다니다 몇 번 마주쳤는데 말도 걸지도 않게 한 손만 들어서 가볍게 흔들곤 다시 갈 길을 가셨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6달 정도 지나서 다시 뵈었을 때는 이미 재발을 한 상태였다.

항암방사선 치료를 했음에도 재발을 빨리했기에 예후는 안 좋은 상태였으나 다시 수술을 하였다.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묵묵하고 씩씩하게 견뎌내셨고 남들은 힘들어서 퇴원을 하기 싫어하나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오래 비워둘 수 없다 하며 빨리 퇴원하고 집으로 내려가셨다.

환자들에게 내 연락처는 절대 주지 않는데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 이기고 내 핸드폰 번호와 집 주소를 받아가셨다.


그리고 몇 달 후 택배기사님께 전화가 왔다.

"집에 아무도 안 계시는데 어디다 두고 갈까요?"

아무것도 시킨 것이 없는데 뭘까라고 생각하며 퇴근 후 집에 가보니 마늘 20kg 1박스가 집 앞에 있었다.

송장에는 삐뚤빼뚤 손글씨로 할아버지 이름이 적혀있었다.


예상되었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몇 달 뒤 할아버지는 다시 재발을 하였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수술적 치료는 불가능해서 이비인후과가 아닌 내과로 입원해서 증상 조절만 가능한 상태였다.

마음은 무겁지만 감사 인사를 위해 찾아갔고 마늘 너무 잘 먹었다는 감사와 함께 치료 잘 받으시라 가볍게 인사를 했다.

길어야 몇 개월밖에 남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더 가슴 아팠다.


그렇게 치료를 받고 퇴원하신 할아버지는 그 이후로 병원에 오지 않으셨다.

그런데 마늘은 받은 지 꼭 1년이 되던 날 , 마늘 1박스가 집 앞에 와있었다.

송장은 더욱더 삐뚤빼뚤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마 할아버지가 평생 해온 마늘 농사의 마지막이었으리라.










작가의 이전글 나는 치프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