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3
나는 퇴근하고 돌아와 전투복을 벗은 뒤 고이 개어 배낭에 넣었다. 이제 전투복 따위는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입을 일이 없을 것이고, 하룻밤만 자면 이 관사에도, 그리고 논산에도 더 이상 올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조금도 아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K의 호프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그리고 그가 내려주는 생맥주를 마시며 그와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무척 서운한 일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K의 호프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며 수영에게 전화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생맥주를 마시러 가고 있어.”
“안부 전해 드려 줘.”
“그럴게. 다음 주 토요일 비행기 예약했어. 아침 비행기야.”
“잘했어. 일주일간은 본가에서 지낼 예정이야?”
“응.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까.”
“좋아. 다음 주에 만나.”
나는 서두르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몇 년간 걷거나 달렸던 길임에도,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특별하게 보였다.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공원에 심긴 작은 꽃들, 건물의 작은 가게들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도 이 길을 잘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카시아꽃은 벌써 생기를 잃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올 때면 여전히 희미하게나마 아카시아꽃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중학생 때의 여름을 떠올렸다. 희망을 발산했던 태양, 포근했던 공기,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내 옆에는 늘 수영이 있었다. 인간의 후각이 오래전 기억을 이토록 단숨에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시각이나 청각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각과 청각은 매번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처리해야 하는 데 반면, 후각은 어떠한 냄새를 맡더라도 일 분 남짓한 시간에 금방 적응하여 일하기를 멈춘다. 시청각 자료실이 시립 도서관이라고 한다면, 후각 자료실은 아주 작은 방에 있는 서가와 같아서 무언가의 기억을 금방 찾을 수 있다.
내가 호프에 도착했을 때, 아직 가게에 손님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듣고 있던 K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는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았고, K는 생맥주를 한 잔 내려 내게 주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아쉽지만요.”
“우선 본가로 가는 건가?”
“네. 호주로 가져가기엔 책이 많고, 또 차도 이제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주 부드럽고 시원한 맥주였다. 나는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간은 이렇게 맛있는 맥주는 마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다. 인천에는, 적어도 본가 근처에는 이토록 맛있는 생맥주를 내리는 호프는 없다.
“그리울 거예요.”
“맥주를 말하는 거지?”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나는 K에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물론.”
“그중에는 볼 수 없는 사람도 있겠죠?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K는 잠시 침묵했다. 아마 그의 삶에 흔적을 남기고 간 몇몇 사람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앞으로 보지 않기로 나 스스로 결단한 경우가 많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보지 않기로 결단했다는 건가요?”
“안 보는 게 낫겠다고 판단해서 안 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보고 싶은 사람이 여럿 있어. 그러나 나는 인간이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보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주의야.”
K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생맥주를 내려 단번에 절반이나 마셨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서. 마치 몸 어딘가에 소음기가 장착되어 불필요한 소리 같은 건 모두 흡수되는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마셨던 거예요?”
K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같이 마셔주는군요.”
그는 가볍게 미소 짓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가게 문을 닫은 뒤 호프 내부의 전등을 필요한 몇 가지만 남겨두고는 모두 껐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손님과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게 내 철칙이었으니까.”
“저는 아직 손님인걸요.”
“가게는 문을 닫았고,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손님이라고 할 수 없지.”
우리는 마치 합의라도 한 듯 침묵한 채 재즈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색소폰이 주된 흐름을 이끄는, 묵직하면서 매혹적인 음악이었다. 음악 같은 건, 특히 재즈 같은 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런 나로서도 이렇게 멋진 색소폰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보통의 폐활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마 색소폰 연주자는 색소폰을 부는 시간 외에 달리거나 수영함으로써 폐 기능을 관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K는 나의 맥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맥주를 한 잔 더 내려 가져다준 다음에 냉장고에서 닭 날개를 꺼내 구웠다. 역시 아주 진지한 태도였다.
나는 구운 닭 날개를, K는 마카디마아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주로 음악에 집중했고, 가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K는 재즈에 지식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는 찰리 파커나 듀크 엘링턴도 잘 알지 못했다― 제 호프에서 재생되는 각 트랙의 제목이 무엇이며 어떤 악기들로 연주되는지 정도는 분명히 꿰고 있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하루 여덟 시간씩 재즈를 듣는 남자니까. 나는 문득 궁금하여, K에게 보디빌더 시절에도 술을 마셨는지 물었다.
“마시지 않았어.”
“근육에 방해가 되나요?”
“얼마쯤 마시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강박이 있었어. 하루 다섯 끼를 정해진 시간에 먹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생각하고 행동했지. 그리고 그 계획을 맞추려면 술 같은 건 마실 여력이 없었어. 마지막 끼니를 먹고 얼른 소화시키고 잘 준비하지 않으면 내일의 일정에 영향을 주니까. 하루 다섯 끼를 먹으려면 늦잠을 자서는 곤란하거든. 물론 실업팀에 소속되어 연봉을 받던 시절이니까, 마땅히 그럴 만해. 그러나 보디빌딩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독한 삶이야.”
“그러나 지금도 고독해 보이는데요.”
K는 푸, 하고 웃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맥주를 마셨다.
“나는 원래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이니까 보디빌딩을 하든, 하지 않든 고독하기는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하지 않는 편이 조금 더 인간적으로 고독하지.”
“그리고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죠.”
K는 나를 쳐다보곤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젠가 K에게 왜 그렇게 스스로 가둬놓고 고독하게 사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쓸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은 고독하게 살아야 하는 법이지”하고 조용히 덧붙였다. 나는 고독하게 태어난 인간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누구라도 고독한 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을 말했을 때 그는 그건 그저 일반론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K에게 스스로 고독한 존재라고 인지하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 물었다.
“대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아. 어떤 변화가 분명해진 건 말이야.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짧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내일 아무런 일이 없어요.”
K는 등대지기와 같은 침착함으로 한동안 맥주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단순히 말하기를 멈춘 상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자신의 의식을 온전히 내부에 집중했을 때 발생하는 장엄한 침묵이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하기에 앞서 ‘어떤 것들’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