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14)

장편소설

by 김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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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새인가 인간에게서 줄곧 느껴오곤 했던 호감이나 애정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 쉽게 말해 염세적인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한 이후였으니 스물셋, 넷쯤 되는 나이였을 거야. 처음에는 특정 사람에게 한정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군. 나는 모든 종류의 인간에게서, 예컨대 가리지 않고 흥미를 잃어버렸어. 나로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어. 그런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도, 책에서 읽어본 적도 없었으니까. 나는 그저 묵묵히 운동했고, 쉬는 때에는 혼자 산책하거나 침대에 누워 사색에 잠겼어. 그러나 물론 그러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라 나중에는 책을 읽기 시작했지. 책을 읽다 보면 그러한 고립의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방면으로 나아가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힌트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야. 나는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짚이는 대로 펼쳐서 읽어보며, 나의 흥미를 이끄는 책을 사 읽었어. 어느새 독서는 나의 취미가 되었지. 그러나 그것이 절대 긍정적인 변화였다고 볼 수는 없어. 어쨌든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 갇혀 지내는 삶은 햇볕을 쐬지 않는 삶과 같아서 서서히 썩어가게 되지. 그때는 그걸 몰랐어. 나는 나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운동하고, 운동을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은 책상에 앉아서, 혹은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었지. 나는 육체에 만큼이나 내면에도 향상심을 갖게 되었어. 그리고 그런 나를 스스로 훌륭한 인간으로 여겼지. 나는 쇠만 쥘 줄 알 뿐 무식한 보디빌더들을 속으로 비웃기도 했어. 아주 오만하게도 말이야. 나는 물론 그러한 삶을 살면서 여자를 만나기도 했어. 그러나 오만했던 나에겐 삶을 게을리하는 여자들이 경박해 보였어. 나는 금세 혼자가 되었어. 나는 이십 대가 저물어 갈 때쯤 한 여자를 알게 되었어. 당시 나는 시설공단에 소속되어 연봉을 받으면서 선수 생활하고 있었지. 연봉은 부족하지 않았어. 꾸준히 성적만 낸다면 계약을 유지하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러나 그 시기 나는, 대학원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했어. 보디빌더는 마흔 전후에 은퇴하는 게 일반적일 뿐 아니라, 은퇴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일도 상당히 제한적이야. 그러니 일단 석사까지 공부해 놓으면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라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거야. 나는 이왕 공부한다면 몸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그쪽 길은 열려 있지 않아서 영양학을 선택했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 그 여자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뒤에 연달아 대학원에 들어온, 사회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 학생일 뿐이었어. 내가 그 학생에게 시선을 빼앗긴 건 물론 그 여자의 외모 탓도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뿐만은 아니었어. 오히려 외모로만 따지자면 더 예쁜 여학생들도 많았지. 하지만 그 여자는 특별했어. 그때는 그 특별함을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여자에게는 자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어. 자신의 의식을 자기의 외적인 모습을 검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 있는 현재에 집중하고 있었어. 그런 사람의 눈은 정말 반짝반짝 빛나지. 아마 그건 너도 경험해 보았을 것으로 생각해. 나는 보디빌딩 세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었어. 그 세계야말로 온 의식을 제 외모만을 가꾸는 데 몰두한 세계야. 내 주변에는 내면은 붕괴된 채 외면에만 몰두하는 사람뿐이었지. 나는 그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어. 그런 내가 그 여자에게 매력을 느낀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지. 나는 그 여자를 좋아했어. 그러나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었지. 무엇보다 그런 여자라면 필시 나 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이 나의 의지를 꺾었어. 이상하지. 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놈이라고 여기기도 했으니까. 내 안에 그 두 가지 자기 인식이 공존하고 있었어. 어쨌든 한 학기가 흘렀어. 여름에는 나도 시합이 있고 해서, 그 여자를 떠올리는 시간이 점차 줄었지. 그리고 다음 학기가 찾아왔을 때 나는 그 여자에게 다가가, 같이 밥을 먹을 수 없겠냐고 물었어. 그 이상은 미룰 수 없어 저질러 버리고 만 거야. 그랬더니 그 여자가 어떤 이유 때문이냐고 묻더군. 나는 당신에게 호감이 생겨서 그런다고 말이 나오지 않았어.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그 여자는 필시 도망쳤을 거야. 나는 사실 운동선수라고, 공부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아 과정을 따라가기가 벅찬데, 친구를 사귀면 이 과정을 따라가는 데 동력이 될 것 같아서 그렇다고 사실을 섞어 거짓말했어. 그 친구는 내 제안에 응해 주었어. 물론 그녀라고 나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던 건 아닐 것으로 생각해. 어쨌건 그녀는 여자고 나는 남자니까. 아마 얼마쯤은 내게 호기심이 생겼겠지. 나는 그녀와 일주일에 한두 차례 같이 밥 먹는 사이가 되었어. 그러나 그렇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내 모습이 얼마만큼 진짜였는지, 난 솔직히 모르겠어. 난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연극배우처럼, 그녀가 좋아할 만한 어떠한 인간을 연기했어.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얼마쯤은 실제로 내가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나는 결과적으로는 목표를 성취했어. 우리는 연인이 되었지.”

K는 그쯤에서 생맥주를 반 컵이나 마셨다. 맥주는 전처럼 소리 없이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 잔을 비웠고, K는 새로운 두 잔을 더 내려서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반 컵을 마셨다. 그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에게도 누군가 곁에서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갈망이 있었어. 하지만 어떤 갈망은 채워지지 않다 보면 점차 작아지는 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우리나라나 독일처럼 GDP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하고, 또 필수품을 수입하는 국가가 있는데 반면, 일본이나 프랑스처럼 꽤 자급자족이 가능한 나라들이 있지. 인간도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삶의 활력을 얻는 인간이 있는데 반면, 홀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인간이 있어. 나는 후자에 가까운 인간이 되었어. 이전에는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야만 채워졌던 무언가는 퇴화하여 사라졌고, 삶의 동력을 운동이나 독서와 사색을 통해 얻었지. 그런 내가 꼭 연애를 해야 했을까? 이런 질문은 당시에 내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이었어. 우리가 때로 어떤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고선 한두 번 쓰고 안 쓰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도 그저 순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거야. 하지만 충분한 의심과 논증이 있기 전에 이미 나는 그녀와 연인이 되었어. 그러니 늘 불안했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식으면 나의 개인적인 성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 그녀를 내쫓고 나 자신을 독방에 가둘 테니까. 그러나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그녀가 좋아할 만한 어떤 인간을 연기했기에, 그녀는 나의 개인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았어. 그저 내가 보디빌더이기에 타인과 만나지 않고 대부분 시간을 혼자 보낸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나는 그녀에게 나의 성향을 숨기려는 건 아니었어. 어떤 인간이나 사랑에 빠지면 자신의 못난 모습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잖아. 나 역시 그런 것뿐이었어. 그녀는 훌륭한 사람이었어. 미(美)보다는 청결을 중요시했고,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알았으며, 정신적 향상심을 가지고 있었어. 그러니 내가 그녀에게 실망할 일 같은 건 없었어. 물론 나 스스로 감내해야 했던 어려움은 있었지. 말했듯이 나는 보디빌더였어. 일 년 삼백육십오일 매일 세 시간씩 체육관에서 내가 정해 놓은 운동을 했고, 하루에 다섯 번씩 내가 정해 놓은 음식을 먹었어. 물론 시합 직전이 아닐 때는 한 번씩 일반식도 먹었지만, 설탕이 많이 들어간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어. 예컨대 짜장면이나 탕수육, 떡볶이, 돼지갈비, 이런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는 거야. 그러나 그녀와 연애하면서 나의 규칙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 운동 시간을 줄여야 하는 날도 생겼고, 절대 먹지 않아 왔던 음식을 먹어야 하는 날도 있었어. 여자친구와 둘이 식당에 가서 혼자 도시락을 먹을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당시 강박증과 결벽증이 있었어. 균열을 견디기 힘들었지. 그러나 그것이 여자친구 탓이라고 보는 건 정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어. 여자친구는 평범한 데이트를 원했을 뿐이니까. 또한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해 나를 배려하고 있었어. 그녀는 단 하루도 내게 운동을 쉴 것을 부탁하지 않았고, 데이트 중간에 차를 세우고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 상황 또한 이해해 줬어. 그런 여자는 정말 흔치 않지. 그러나 어쨌든 깨진 규칙은 결과로 나타났어. 나는 매년 개최하는 전국체전에서, 한 번도 체급 삼 등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사 등을 하는 처참한 결과가 나타난 거야. 나는 무척 절망했어. 어차피 나의 재능으로는 국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늘 체급 일이 위를 다투었던 내가 우승 경쟁권에서 밀려나 버렸으니 속상했지. 속상하고 두려웠어. 시합 성적은 곧 생계와 연관되는 것이니까. 나는 다음 시합에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재계약이 어려울 거라는 말도 전해 들었어. 나는 다행히 두 달 뒤에 있던 다음 시합에서 체급 이 등으로 그해 시합을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불안감을 떨쳐내지는 못했어. 공단과의 계약은 언제든지 종료될 수 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거든. 나는 무수한 갈등 끝에 그녀와 결혼하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어.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을까? 나는 결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야. 감정이 불안정하고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야. 언제든지 마음이 바뀌고 그럼으로써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인간이야. 그러한 사실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 그녀와 연애하기 이전에도, 만에 하나 연애는 하더라도 결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런 내가 어떻게 결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걸까. 그때 우리는 고작 이 년간 연애했을 뿐이었어. 그녀는 석사 과정을 졸업한 뒤 박사 과정에 접어든 스물일곱 살의 학생일 뿐이었고. 물론 그녀는 결혼은 이르지 않겠냐고 말했지. 그러나 나는 결혼이 아니면 이별뿐이라는 생각이었어.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결단력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아마 알고 있었을 거야. 결국 그녀는 결정을 내렸어. 보디빌더인 내가 운동에 집중하려면, 밖에서 만나는 연애보다는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결혼 생활이 적합함에 동의한 거야. 우리는 곧 결혼을 준비했어. 그때 나는 공단에서 받는 연봉 외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돈을 벌고 있었으니, 비용은 문제없었어. 학생 신분인 그녀를 배려하여 결혼 준비에 드는 비용과 신혼집 등은 거의 혼자서 해결했지.”

K는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맥주를 반 컵 마셨다. 그리고선 맥주를 새로 내렸다. 나는 그가 마시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제 와 소용없는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내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군. 하지만 이야기를 꺼낸 마당에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럼요. 저도 멈추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래.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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