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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사람 Apr 03. 2023

3.(더) 그레이빙하와 백야

처음 트레킹, 파타고니아 이야기

그레이 빙하를 바라보며 걷는 풍경

   총 4일의 W(더.브.을.유) 코스중 첫날, 더. 일정이 시작됐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한낮 시간에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출발하여 그레이 빙하를 다녀오면 된다. 트레킹 코스라고 해봐야 뭐 대단한 표지석이나 길이 정비되어 있는것은 아니었다. 딱 한두 사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폭에 길이란 것도 앞서간 자들이 걸어다니며 눌러다져진 길이 전부다. 정말 드물게 표지판이나 이정표 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한참을 가다 여기가 아닌개벼..하고 뒤돌아볼 때쯤 나무로 대충 만든것 같은 표시가 스윽하고 나타난다.

   좁은 오솔길 옆으로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낸 호수를 보고 걷다보니 저 멀리로 그레이 빙하라는 이름의 빙하절벽이 서있다. 마치 홍해가 일어선 듯이 서있지만, 사실은 산과 절벽에 쌓여있던 수십미터가 넘는 높이의 빙하가 언저리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어 멀리서 보면 하얀 얼음케잌을 자른 것처럼 보인다.

   반대편 암벽산에는 거대한 빙하가 여전히 눌러붙어있다.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위태로운 산길을 조심조심 걷는다. 평온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바람은 몹시 거세다. 낭떠러지 옆에서 한발만 삐끗하면 빙하호수로 떨어질것 같다. 호수의 물이 푸른빛이 도는 짙은 우윳빛이라 그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디. 고지대라 하늘과도 가까워 구름과 호수가 띠를 이루고 층층히있다. 왠지 이 빙하호수에는 빠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


지천에 야생화가 날것의 향기를 뿜다.


   여기 파타고니아를 다니다 보면 나무들도 자연 그대로 있고, 지천에 야생화가 날것의 향기를 내뿜는다. 비와 바람과 눈과 태양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서양톱풀 yarrow

서양톱풀은 톱모양의 잔 잎들이 치유의 기능도 하여 허브로 취급된다. 보통 손뼘 정도의 길이로 자라고 길다고해야 팔길이 정도로 서로 덩굴로 자라나있다.

가울테리아 무크로나타 Gaultheria mucronata

가시가 많은 식물인 가울테리아 무크로나타는 남미 아르헨티나 남부와 칠레에서 자생하는 진달래과에 속하는 식물의 일종이다. 칠레 남부의 화산 지역에서 수목선 위에 널려있으며 키가 작아 보통 0.6~1.5m인 상록 관목으로서 작은 종모양의 백색 꽃이 5~6월에 피고 가을부터 겨울까지 지름 12mm의 백색 분홍색 적색열매가 난다.

그리고 어느 길에서나 익숙한 서양민들레를 흔히 볼 수 있다. 파타고니아에서도 서양민들레는 지천에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백야, 왁자지껄한 산장의 펍에서 밤을 지새우다.


   그레이빙하를 보고 돌아오면서 한동안 시계를 보지 않았다. 하늘은 여전히 약간 흐리고, 호수도 우윳빛갈을 그대로 유지한 채 바람이 파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올라가면 낮은 잡목과 민들레가 만발했고, 또다른 고개를 내려가면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줬다. 야지가 펼쳐지면 또 다른 빙하산과 숲길이 이어져있다. 한참을 다른 풍경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태양빛이 여전히 강렬하여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아니 실은 우리가 무척 빠르다고 생각했다. 산장에 돌아와서도 하늘색과 주변 느낌이 낮에 출발할 때와 크게 달라보이지 않고 여전히 밝고 따뜻했다. 그제서야 시계를 보니 저녁 9시였다. 이날만 8시간 이상을 걸은 셈이다. 말로만 듣던 백야 속에 들어온 것이다.

   남미의 여름은 밤이 길다. 하얀밤, 즉 낮이 길어 백야가 계속되는 동안은 야외활동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이론적으로는 체력만 허용한다면 밤새 걸어도 되고, 밤 10시 넘어서도 산행이 가능하다. 식당도 대개 밤 11시나 12시까지 문을 열기때문에 충분히 야외활동을 하고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속된 말로 뽕을 뽑을 수 있는 것이다.

   한낮에 산행을 시작한 탓에 돌아갈 시간과 거리를 생각하며 그레이빙하 끝까지 못가고 발길을 재촉했는데 돌아와봐도 시간이 그대로였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산장 2층에 있는 펍으로 갔다. 너나 할것없이 가득 자리에 앉아 파타고니아 맥주나 칠레산 와인을 시키고 그날의 피곤을 푸는것 같앗다. 우리도 칠레 와인을 마시며 한참을 쉬었다. 한잔, 두잔을 마시고 시간은 이미 10시가 넘어가는데도 창 밖은 낮에 산장에 왔을때 모습 그대로였다.

 

  서양 구전동화에 산에서 도끼질을 열심히 하다 돌아왔더니 삼십년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무슨 마법이었을까? 그 마을에 무슨 저주가 내린걸까? 아니면 축복일까? 그게 동화가 맞긴 하나? 하고 늘 궁금했었다. 이곳 파타고니아에서 백야의 한가운데 와보니 그 동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런 시간 순삭 이야기 같은 것은 백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에 접해 인간이 신의 섭리로 풀어낸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우리는 파타고니아에 거창한 목표나 목적없이 와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일단 오늘 하루를 잘 보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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