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트레킹, 파타고니아 이야기
2. (브) 둘째날은 더.브.을.유 총 W 4일 일정 중 브. 에 해당하는 날 이다.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서 이탈리아노 산장, 프렌치 밸리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다음 저녁엔 숙소인 도모 프란세스 산장까지 가는 일정이다. 아침에 산장 도미토리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6시쯤이다. 나이 50이 될때까지 처음 그렇게 오래 걸어온 정신적 충격과 신체적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크게 아프거나 힘들진 않았다. 이렇게 또 8-9시간을 내리 걸어도 되나? 우리가 정말 미친것은 아닐까? 우리 스스로가 미덥지 않았지만 산장 식당에서 식판만한 고기와 빵을 배불리 먹고 심지어 점심 샌드위치까지 브라운백에 받아오니 다시 든든해졌다.
그란데 산장을 나와 이탈리아노 산장까지 가는 길엔 작은 슾지 같은 연못과 빙하가 녹아내린 호수가 곳곳에 있었다. 산이 깊으면 계곡도 깊다고 했나. 계곡이 깊으니 곳곳에 빙하가 녹아내리면서 예기치못한 호수와 연못들이 생긴것 같다.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풀과 이끼와 초목의 원시적인 색감이 거센 바람에 파도를 타고있었다.
걷다 보면 불에 타다만 하얀 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몇년전 토레스 델파이네의 파이네그란데 유역에 큰불이 났다고 한다. 이 일대를 걷다보면 타고 남아 고사한 하얀 나무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산불위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그냥 놔뒀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연퇴화되도록 놔둔것 같다. 죽고나서 하얗게 변한 나무들은 사실 하얗다기 보다는 나무 본연의 색을 잃은 것이다. 색을 잃고나서 나무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으면서 파타고니아에 스산한 풍경을 연출한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이렇게 불탄 나무들도 풍경이다. 호수와 늪과 바람과 물이 저마다의 색을 뿜어낼때, 무채색에 가까운 하얀 나무들이 곳곳에서 색을 중화시킨다. 잎파리도 다 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모습은 그 어떤 웅변보다도 강렬하다. 이들 불탄 나무들이 썩어 문드러질때까지 이들은 죽어서도 역할을 할것이다. 생명은 순환하는 것이며 자연은 상호보완적이다.
흔히 버릴게 없는..이란 말이 있다. 뭐하나 쓸모 없는게 없이 다 제각각 역할을 하고 귀하다는 뜻이다. 파타고니아는 어찌보면 버릴것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척박한 돌과 암벽, 연혁을 거슬러올라 찾기도 힘든 빙하, 태평양 바다에서부터 안데스 산맥 동쪽을 향해 거세게 휘몰아치는 대양의 바람, 그리고 지구의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추위가 만들어낸 돌과 빙하의 중간지대. 어느 하나 먹을것도 쓸것도 없이 버릴것들만 남았다. 그래서 지구의 트레커들이 파타고니아에 와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것이다.
프렌치 밸리라는 낭만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숲속에서는 작은 오솔길들이라도 있었으나 산정상에 가까울수록 돌무더지 위로 위태롭게 걸어가는 것이 다다. 이게 정말 길일까 싶을때쯤 나무 등걸이나 큰 바위에 그려진 빨간색 표시가 보인다. 길이 맞다는 표시인데... 표시라기 보다는 빨간색 그 자체이다. 마지막 프렌치 밸리 전망대까지 올라가기 직전에도 여러번 포기하려고 했다. 그냥 멈춰 갔다온 셈 치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못내 거의 정상까지 와서 못가는게 아쉬웠는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남편 덕에 나도 결국 프렌치 밸리 정상까지 올랐다.
이제 다시 돌아가는 길도 최소 5시간이다. 그 돌무더지 위를 조심조심 내려가야 한다. 거의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돌탑을 걸어서 내려가는 격이다. 총 10시간, 족히 5만보에 달하는 산행을 마치고 도모 프란세스 산장까지 가는데 마지막 산장 안내표지가 보이자 우린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둘째날 묵은 도모 프란세스 산장은 첫날묵은 그란데 산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최근에 생긴 곳이라 여행사 상품이나 예전 여행기에선 없었다. 생긴것도 무슨 천막으로 동그란 돔을 만들어 대충 세워놓은 움막 같았다. 예약할때도 영 미덥지 않았는데, 막상 도착해 그 돔을 봤을때는 더더욱 미덥지 않았다. 왠지 천막사에 사기당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들어가보기 전까지는...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도모 프란세스 내부로 들어가자 젼혀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두개의 섹션공간에 8개의 도미토리 나무침대가 있었다. 각 침대 머리맡엔 작은 램프가 있었고, 이불 대신 등산용 침낭이 있어 쏘옥 들어가 자면 그만이었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도미토리 모두 개방형이라 서로 말도 작게하고 크게 남에게 불편 주지 않게 노력하게 됬다.
산장 리셉션 건물은 대여섯 평도 안되어 보이는 그냥 한층짜리 목조건물인데 여기도 있을건 다있다. 이 공용공간에서 식사도 하고, 맥주도 마시고, 리셉션 일도 한다. 최소 3일에서 열흘 이상 걸리는 토레스 델파이네 트레킹 코스를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이 산장 시스템에 있었다. 산장이 다 깨끗하고 심플하면서 필요한건 다있다. 여기서 “다 있다”에 방점을 두면 안되고, “필요한” 에 방점을 두어야한다. 딱 필요한 정도만 요구해야한다. 웬만한건 산장 리셉션 데스크의 젊은 양반한테 말하면 다된다. 여기서 안되는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리라. 리셉션 데스크란 것이 정말로...데스크 하나다. 책상 하나에 직원이 앉아있고 그게 다다...
파타고니아의 산장은 하나같이 개방이 주는 안도감과 작은 도미토리 침대가 주는 편안함이 조화를 이루었다. 하루 종일 걷고 돌아오면 발은 불같이 타오르고 있고 온몸이 정상이 아닌데, 산장 안으로만 돌아오면 고즈넉하고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수 있다. 아파서 잘수없는게 아닐까.. 걱정은 웬걸.. 눈떠보니 아침이다. 종일 걸으면 너무 피곤해서 잠은 정말 잘온다고 하더니 그런가보다.
아침 출발하기 전에 호수를 바라보며 야외테이블에서 라면을 끌여먹었다. 한국에서부터 정성스레 가져간 라면과 고추장, 황태가 제몫을 하였다. 라면을 다 먹은 다음엔 산장펍에 올라가 모닝맥주를 마신다. 그렇지.. 역시 술은 아침에 먹어야지... 그러고도 이 산장을 떠나기가 싫었다. 갈길은 멀고 3일째가 되는 오늘은 또 어떤 길일지 알수 없었다. 두려움 반, 설레임 반은 믹스커피에 녹여버렸다. 다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