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주머니 없이 살아봐봐...
회사 동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에 테니스를 치고 있다. 대부분이 남자이고 여자는 나를 포함해서 딱 두 명인데 실력 상관 않고 혼성으로 복식 경기를 하고 있다. 해질 무렵 어슴푸레 석양이 내리깔린 가운데 산들 바람이 불어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날리기엔 최고다.
하루는 경기를 하는데 상대편 여자 동료가 공을 넣을 데가 없어서 왼손으로 공을 잡고 오른손으로 서브를 넣다가 공을 떨어뜨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경기를 중단하고 내 테니스 볼클립을 주었다. 그 친구는 이런 볼 클립을 처음 보았다. 내가 바지나 치마 위 허리단에 끼우고 거기에 공을 어떻게 끼우는지 알려줬다. 그 친구는 바로 너무 편하다며 이런 게 어디 있었냐고 하면서 경기를 재밌게 이어갈 수 있었다.
같이 운동하던 남자들도 모두 테니스 볼 클립을 처음 본다면서 신기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들은 여자들과 보통 경기를 같이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들 운동복에 보통 주머니가 없다는 것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테니스볼 클럽의 필요성부터 존재는 더더욱 몰랐다.
내가 Tennis 볼클립을 알게 된 것도 작년에 여자 테니스 코치를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나는 수년간 레슨을 받고 경기를 하면서도 상대방 여자가 거의 없었고 여자 코치가 없었다. 그런데 여자의 운동복에는 대개 주머니가 없었다. 특히 테니스 볼은 항상 써브 공을 두 개 갖고 하는데 나머지 하나를 넣을 데가 없어서 발 근처에 두었다가 미끄러지기 일쑤이고 또 다른 선수들에게도 피해를 주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써브할 때가 늘 부담이었다. 사실은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어서 그런것인데, 내가 여자라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에 만난 여자 코치가 볼클립이란 걸 알려줬다. 얼마 하지도 않았다. 볼클립을 사서 경기를 하기 시작하자 나 스스로도 자신감이 생겼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편하게 경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다른 여자 동료에게 볼클립을 알려 주게 되었다.
테니스치마 안쪽 바지에 옛날에는 공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도 있었지만 그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남자들은 다 바지 입고 그 바지는 항상 넓은 주머니가 있다. 여자들은 운동하는 사람들도 드물기 때문에 단순한 연대도 이렇게 힘들다. 초보 여자가 테니스 클럽에 가입하기도 그렇게 어려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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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여러 운동을 하는데 왜 여자의 옷에는 주머니가 거의 없을까? 여자들의 슈츠와 정장에서 주머니 찾기란 더 어렵다. 볼클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침 오늘 읽은 책에 여자의 옷과 주머니 역사라는 부분이 있어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 책 - 친애하는 슐츠 씨 | 박상현 - 교보문고 (kyobobook.co.kr)
박상현의 글에 의하면,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한국적 상황이 아니었다. 서양 의복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92-100) 1899년 뉴욕타임스에도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것이 문제라는 기사가 있었으니, 당대 여성들까지 문제로 지적했음이다. 그런데 2016년에도 "이상하고 간단하지 않은 그리고 성차별적인 주머니의 역사"란 제목의 기사가 있었으니 여자옷에 없는 주머니는 얼마나 공고한 역사인가.
고대부터 옷이란 긴 천을 두르는 형태로서 남자나 여자나 길게 두루는 치마 형식이었다. 그러다 바지가 처음 등장한 게 1330 년대 갑옷 Armor이 등장하면서 라고 한다. 갑옷은 몸에 맞게 철과 금속으로 만들면서 몸에 맞게 해야 했고 재단 Tailoring 이란 것이 시작되었다. 이 갑옷 바깥쪽에 허리띠에 가깝게 주머니를 차고 짧은 칼이나 급한 식량을 넣게 한것이 바로 주머니였다. 처음엔 옷과 분리된 주머니, 즉 파우치 Pouch 라고 했다.
갑옷이 남자들이 평상시에도 입는 본격적인 바지 형태로 정착하면서 1550년대가 되면 남자 바지 속에 주머니를 넣게 된 바지주머니가 탄생한다. 남자 옷이 바지의 디자인과 함께 발달한 데는 전쟁과 스포츠 같이 남자가 전담 하는 활동이 사회를 리드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의복의 역사에서는 항상 남자 옷이 여자 보다 더 발전된 형태였고 먼저 현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 똑같은 주머니를 왜 여자의 옷에는 달 수 없었을까? 중세에서 근대까지 주머니는 남자 옷의 전유물로 인식되었고 여자 옷에는 굳이 주머니를 달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남북전쟁 당시 농장에서 달아난 노예 의 인상착의를 설명할 때 주머니 없는 옷이 항상 강조되었다고 한다. 여담인데, 미국의 독립 선언문을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다양한 분야의 조 예가 깊었는데 남자 주머니에 여러 가지 물건을 갖고 다니게 포켓 사이즈라는 것을 발명 했다.
여자옷에 주머니가 붙은 건 1860 년대 이후에야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조차 여성의 옷에 맵시가 안 난다는 이유로 때로는 여성이, 때로는 남성이 반대하고 조롱 했다. 그 증거가 1899년 뉴욕타임스에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것이 문제라는 기사이다. 여전히 여자 옷에 주머니를 달아주는 것은 마치 대단한 특권을 주는 것인양 극히 제한적이었다.
심지어 1940년대 2차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여군부대를 만들었는데,
처음엔 군인정복에 주머니 없이 핸드백을 들고다니게 했다고 한다.
지금이라고 크게 나아진 것 같진 않다. 요즘은 남녀 구분없이 대학생활까지 하고, 여자들도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주머니의 필요성은 남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여전히 여자옷엔 주머니가 없거나 너무 작은 경우가 많아 핸드폰과 사원증 지갑 같은 걸 넣지못해 잃어 버리기도 하고 많은 불편을 겪는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다가 지구에 역추진해 돌아오기를 몇번이나 반복하고도 남는 21세기에, 주머니 얘기를 해야겠는가?
주머니 없는 역사 History without Pockets
... 대학생활부터 직장생활도 30년 넘게 하고 있는 나는 이 "주머니 없는 역사"에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는데, 다른 여자들은 이젠 익숙해졌을까?
정말로 150년 전의 변명 내지는 이유처럼 주머니를 달면 옷에 맵시가 없어지니까 여자들이 주머니가 있는 옷을 선호하지 않는 걸까? 이런 설명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마치 그것이 여자의 책임 또는 선택인 양 말하곤 한다.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자들이 느끼는 이 불편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없는게 아닐까? 여자 옷에 주머니가 없는 것을 알기도 어렵거니와, 알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것 같다.
설령 주머니를 달더라도 무슨 동전 주머니같이 작게 만들기 일쑤다. 어차피 주머니를 달꺼라면 핸드폰이라도 넣게 남자 옷과 비슷하게 좀 큼직하게 달면 될 일을 굳이 작게 만든다. 심지어 여자 옷엔 "가짜 주머니"까지 만든다. 이 뚜껑머리 부분을 Flap이라고 하는데 주머니 뚜껑 같은것만 달고 실제 주머니는 안 만드는 것이다. 주머니를 줄 것도 아니면서 가짜 주머니 뚜껑은 도대체 왜 달까? 옷에달린 게 진짜 주머니인줄 알고 샀다가 뚜껑머리만 있는걸 알고나서 정말 뚜껑 열리는 줄 알았다.
다음 번에 테니스 할 때 같이 운동하는 남자들 모두에게 볼클립을 주기위해 한 열개 주문했다. 일인당 하나씩 줄것이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왜 여자들이 서브할때 그렇게 힘들었는지 넌지시 설명해주고 싶다. 그냥 우리의 고충을 들어주고 이해만 해줘도 좋다. 여자옷에 주머니 없는게, 같이 운동하는 남자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