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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과 불공정함이 만났을 때

- 장애인들의 지하철 파업을 보며 드는 생각들

by 걷는사람

흔히 한국사람들 보고 배고픈건 참아도 배아픈건 못참는다고 한다. 가난은 참아도 불공정한 건 못참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불공정하고 불의한 것엔 쉽게 참지 못한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하고 쉽다. 요즘 젊은 세대 소위 MZ세대들을 보면 불의는 참아도 불편한 건 못참는것 같다. 젊은 세대가 꼭 잘못 되었다기 보다는 그마늠 사회가 각박해지고 여유가 없다는 반증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만약 불공정과 불편함이 다투게 될 때 어느 편을 들어야할까? 이글은 2022년 즈음 서울시 일부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벌어진 장애인단체의 시위와 논란을 보며 끄적여본 것이다.



지하철역에서 장애인 단체의 시위


지하철 승강장에서 벌인 장애인들의 시위로 많은 시민들이 출근길에 큰 불편을 겪었다. 시민을 볼모로 삼으니까 소위 "나쁜 시위"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시민을 불편하게 하니까 하면 안된다고도 했다. 불편함을 극대화한 시위이다. 반면 이들 장애인 단체는 장애인들도 똑같이 세금내는 국민인데 장애인들의 이동을 위한 수단이 충분치 않은것은 불공정하다고 한다. 불공정과 불편함이 만난 것이다.


불편하지 않은 시위는 없다. 노동자들의 파업, 태업, 시위 모두 일상적으로 편안한 행동이 아니다. 아름답고 편한 시위란건 애초에 없었다. 목소리를 내고 듣게 하려고 하는게 시위인데, 편하게 될것 같으면 어딘가서 이미 그 목소리가 전달되고 대표되었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시위나 단체행동을 하는 것이다. 불편한 행동을 할수있도록 법으로 보장한 것이다. 누구에게 불편하냐고? 대개 사용자, 사장 또는 권력자에게 불편을 끼치게 한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처럼 불편함이 일반 시민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 그건 어떤 특정 이슈에선 일반시민도 일종의 반사이익을 누렸던 사용자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신속하고 편리한 우리의 지하철 교통시스템은 절대다수인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던 편의라 특혜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왔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빠른 대중교통 시스템은 극소수의 장애인들의 이동권을 무시한데서 가능했던 특별한 편의였던 것이다. 장애인의 느린 교통권은 일반시민의 빠른 교통편의를 위해 후순위로 밀쳐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매일 타는 지하철에 장애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평범한 시민들 모두는 매일 십초 더, 몇분 더, 한시간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면 장애인 한명이 안전하게 버스를 타게 하려면 같은 버스를 타는 일반시민들이 10초에서 20초 정도를 더 기다려야한다. 장애인 휠체어를 태우기 위해 버스의 일부공간은 비워둬야한다. 버스도 개조해야하며 여기에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은 다시 버스요금으로 전가된다. 지하철도 마찬가지이며, 규정상 지하철 역에는 장애인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한다. 이 역시 비용으로 처리됐었어야 하는데 가볍게 무시되어왔다. 장애인들에게 지하철 교통 접근권의 문제는 단지 불공정한 게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하다. 즉, 장애인들은 항상 불편함과 불공정함을 동시에 받고있었고, 지하철시위를 하게되면 일반 시민은 단지 불편할 뿐이다.


공공재


그런데 특정 회사의 사용자나 노동자와 달리, 지하철이나 버스, 도로 같은 교통시설은 시민이라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하는 기본적인 공공인프라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전체와 일반 사람들 전체 모두가 쓸 수 있어야 하는 인프라다. 어린이가 못타게 모든 문턱을 높인다던가, 노인이 길을 건너기 어렵게 횡단보도의 보행신호 속도를 짧게 하면 이들은 바로 큰 불편을 겪게된다. 반대로 자동차 운전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편익을 누린다. 그러나 특정 개인와 특정 단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은 아니므로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이런것이 바로 전형적인 공공재이다. 이익과 불편에 비배제성과 비경합성이 존재한다. 도로와 지하철, 철도, 버스, 광장 이런 인프라는 누구의 출입을 막을 수도 없고 따라서 편익과 불편도 모두에게 비슷하게 흩뿌려진다. 그래서 국가와 지방자체단체의 세금으로 이런 인프라를 짓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가 이런 인프라를 이용하기 어렵게된다면 그건 공공재의 편익을 공정하게 나누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의도하지 않게, 혹은 의도적으로 느린 보행자들인 장애인, 노약자, 어린이들의 교통접근권을 무시하는 셈이다.


일부에선 일반 시민들을 볼모로 한다면서 이 이슈를 장애인과 일반 시민의 대립으로 좁혀가고 있다. 공공재의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들여 나서야한다. 권한을 가지고 나서야 할 행정당국이 나서질 않으니 공연히 일반시민들의 불편만 더 가중되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공연히 장애인과 일반시민의 갈등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장애인들이 일반 시민을 불편하게 하는건 그 보통 사람들이 밉거나 나빠서가 아니다. 장애인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위해 어쩔수 없이 시민들을 볼모로 잡고 불편함을 느끼게 하려고 한것이다. 불편해야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말이 와닿는다.



정책은 좀 불편해도 항상 옳은 것이 이기기를


선거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긴다고 한다. 그러나 정책은 불편해도 항상 옳은 것이 이겨야 할 것 같다. 강하고 편리한 것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정책은 어떨때는 그 소수자들에게 특혜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배려가 되기도 한다. 정책적으로 이를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소수가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외면받는 사람들이면 배려가 되고, 그 소수가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이면 특혜가 되는 것이다. 단지 소수를 위한 정책은 그들에게만 주니 일반 대중에 비할때 특혜가 된다는 주장은 각박하다. 어떻게 아냐고? 보면 안다.


* 지하철 속 장애인은 왜 죄송해야 할까요? - 오마이뉴스

* "장애인은 원래 이만큼 걸립니다"…출근길 '불편함'이 공감 되려면 -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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