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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호 Dec 09. 2021

K의 전설

우적동에 살다(7)

 K가 50대 초반이었던 2000년 초에 사내마을은 이장 선출에 대한 기존 질서가 무너졌다. 사내와 우적동 마을은 정씨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안씨와 이씨, 박씨 순이었다. 2000년 전까지 정씨가 아닌 이들은 이장에 관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정씨들은 세력에서 마을의 과반이 넘었기에 그 힘으로 다른 성씨가 이장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0전까지 사내마을 이장의 조건은 무조건 정씨였다. 이장을 선출하기 위한 마을회의는 따로 필요치 않았고 정씨들이 추천하면 그것으로 조건 없이 승인되었다.


 그랬던 이장 선출의 기준이 2000년이 되면서 무너졌다. 마을 사람들은 정씨 이장들의 묻지 마 장기집권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갖어야만 했다. 정씨 이장들은 너무도 무능했고 마을에는 비리가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정씨들은 허다허다 일자 무식자들까지 이장으로 내세웠다. 마을 자금의 개인적인 유용은 거의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러다 농자금과 추곡수매  배정 과정에서 계속해서 형평성이 상실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정씨 일부 사람들이 마을 배정량을 거의 독차지했다.  면에서 정씨 이장들의 무능과 비리는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상은 민주사회로 나아가는데 사내마을은 여전히 조선의 봉건사회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은 새로운 이장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에서 당시 청년에 속했던 K가 주목되었다. 당시만 해도 K는 중학교까지 졸업하여 무식한 정씨 이장들 보다 학식이 높은 편이었고 특정한 개인 비리가 없었다. K는 정씨 밖의 성씨로 마을 사람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최초로 드디어 이장에 등극하게 되었다.


 K로 이장이 바뀌었지만 마을 일들은 그다지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내마을에서는 마을 주민의 자체적인 사업이랄 게 없었고 마을일은 면사무소와 농협의 지시사항을 잘 전달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면내에서 더 이상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기에 마을 사람들은 K의 3선 장기집권을 받아들였다.


 K의 3선 연임 마지막 해 갑자기 사내마을 여기저기에 늘어난 수백 기의 외부 묘지로 다시금 사내마을은 면내에서 비웃음 조롱거리가 되었다. K가 이장이 되기 전부터 일부 마을 사람들은 묘지 장사를 통해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마을로 외지인 묘지를 받아들이고 대신에 마을에 일정 정도 발전기금 명목의 통행세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의 별도 수임료를 마을 통행세와 비슷하게 챙기고 있었다.


  당시 농촌지역 대부분 마을 입구에는 청년회 또는 마을 주민일동 명의의 묘지 반입 결사반대의 표지판이 존재했었다. 사내마을은 그와는 정반대 모습이었다. 대부분 마을에서는  마을로 들어오는 외부 묘지를 결사반대했고 주민과 합의가 없었을 시에는 장례 당일에 농기계를 동원하여 장례차량을 막아 묘지를 원천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의 일반적인 마을의 외부 묘지 반입에 관한 풍경이었다. 지금은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묘지보다 파내는 묘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사내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문제와 관련해 마을 내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을에서 묘지 금지에 대한 내규를 정하는 시도는 상상도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한 달에도 몇 번씩 장례차량이 마을로 들어섰고 이들이 낸 발전기금 명목의 통행료는 마을 관광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어찌 보면 묘지 유치에서 마을 주민 모두가 하나의 공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 마을 진입로 대로변에 수십 기의 어느 문중 묘지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벌써 최근 십 년 내에 들어온 묘지를 대충 세어 보아도 오백 기가 넘었다.  마을 골짜기 양지바른 곳곳의 밭이나 산이 묘지로 덮여 나갔다.

 우리집을 찾는 손님들마다 한마디씩 보태고 가셨다.

 "저 아랫 동네는 먼 놈의 맷동이 저렇고도 많당가? 공동 묘지 같데야"


 당시만 해도 사내마을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농민회 일로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고 워낙이 분란이 많은 동네인지라 그냥 외면하고 있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엄청난 묘지들을 보아야 했고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다.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이장 K를 찾아갔다.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니요? 마을이 무슨 공동묘지도 아니고 이장이 허는 일이 도대체 머요?”

“나한테 머라고 허지 말어! 나도 이번은 반대여?”

 "그러면 누가 그랬다는 것이요?”

 "B 씨가 진즉에 중개해서 땅을 팔아묵었고 이번에 들어왔다고 그러데, 나도 면에다 고발해서 아까 면직원이 왔다갔는디 법적으로 어떻게 헐 수가 없다고 그러드만?”


 B씨는 아버지 연배로 묘지 유치의 대부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거의 모든 외부 묘지문제는 그와 연관되어 있었다. B씨를 찾아가 따졌지만 그에게서 어떤 반성의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자신은 마을에 발전기금을 만들어 주었다고 큰소리를 쳤다.


 결국 아는 방송국 기자에게 연락했다. TV 지방 뉴스에 대대적인 묘지 유치 마을의 진상이 보도되었다. 사내 마을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불명예스러운 마을 진상 사건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B씨는 엄다에 사는 모씨로부터 집안 문중의 묘지 이전에 관한 제안을 받았다. 묘지 규모가 크다 보니 중개 수임료 규모 또한 엄청났다. 이번 건을 성사시킨다면 말 그대로 크게 한건을 하게 되었다. 그날 밤 B씨는 곧바로 이장 K를 찾아갔다.


“어이 이번에 말이여, 거시기 엄다 사람한테 거시기 헐 수 있냐고? 연락이 왔네야?”

 "거시가 먼 거시기 다우?”

 “거시기 그 즈그 문중 묘를 새로 거시기해야 허는디 엄다서는 동네서 반대가 심허다고 우리 동네로 오고 잡다고 거시기 잠 해줄 수 있냐고?”

“얼마 내논다고 헙디요?”

“동네다 가는 허던 대로 허고  따로 알아서  생각헌다고 허던디? 

“알았소”


 묘지는 일단 들어오고 나면 그것을 물리칠 방법이 없었다. 땅 주인들은 실 거래 가격보다  비싼 가격에 묘지로 판매할 수 있어서 좋았고 마을 사람들은 놀러 가는데 돈이 들어오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한두 번 일이 아니라 사내마을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심한 경우는 외지 묘지를 유치하는데 다른 사람 소유의 산을 중개하고 수임료를 챙기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했다. 몰래 산에다 묘를 쓰고 나면 어찌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외부 산주들은 산에 오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마을 사람들의 더러운 범죄는 대범하게도 날로 기승을 부렸다.


 이 일을 계기로 마을일에 조금씩 개입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진상 마을이 되어 부끄러운 마을 사람이 되는 것은 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K와 나는 갈수록 멀어져 갔다. K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충돌했다. K의 발악은 어쩌면 그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이장을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의 저항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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