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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호 Jan 11. 2022

어느 눈 내리는 날

눈을 회상하다.

온종일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눈에 대한 기억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어릴 적과 대학생 시절 그리고 농부가 된 이후로 각기 다르다.


부모님과 살던 시절에는 밤새 눈이 내려 온천지를 소복하게 뒤덮고 나면 부모님과 함께 아랫목 이불속에 파고들어 눈을 뜨기가 싫었던 막둥이의 기억이다. 지금도 그 기억은 너무도 선명하고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눈이 많았던 어릴 적 형들과 함께 비료포대 썰매를 하루 종일 타거나 저수지 얼음 위에서 아이스하키를 하거나 노루를 잡는다며 창을 깎아서 온 마을 산을 타고 놀았다. 하루는 덫에 걸려 죽은 노루를 끌고 와 엄마에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 시절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야 했는데 편을 갈라서 대대적인 눈싸움을 즐겼다. 집에 몇 년 동안 들어가지 못했던 수배자의 삶에서 눈이 내리고 추워지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 그 자체였다. 젊음의 패기로 그 추운 시절을 견뎌냈다.


농부가 되어 맞이했던 눈은 걱정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 몇백 평이 무너졌고 축사가 무너지는 일들이 다반사로 발생했고 산골 오지다 보니 길이 막히고 고립되기 일쑤였다. 한 번은 눈길에 미끄러져 데굴데굴 굴러서 차가 완전히 망가 진적도 있었다. 다행히 완전 띠로 다치진 않았지만 한동안 정신적 충격이 컸다. 또 가축을 키우다 보니 수도 동파로 인한 피해가 막대했다. 수도가 얼어버리면 물을 주는데 몇 시간씩 소요되었고 파손된 곳을 수리하기에 정신이 없다.

 지금도 여전히 눈이 내리면 가족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누군가에겐 사랑을 꽃피웠을 매개 수단이었을 낭만의 눈이 나에게는 거의 고난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먹고 살아가는 여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부모님 품속의 눈이 포근했던 것은 부모님이라는 여유가 만들어준 행복이었다.

 어른이 되고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책임이라는 삶의 무게로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하얀 눈을 바라본다.

 오늘 눈은 포근하다. 오롯이 지금이라는 현재에만 집중해 하얀 눈을 바라본다. 세상을 뒤덮은 새하얀 눈이 더없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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