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편해문이 쓴 '놀이터 위험해야 안전하다.'는 책을 마을도서관에서 집단 주문해 읽은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는데 한국의 선택은 더욱 통제를 강화하고 책임을 묻는 것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어른들이나 교사들이 판단해 불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통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어른들과 교사들은 무조건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한국은 아이들에게 갈수록 다칠까 무서워 야외 체육활동이 사라지고 실내체육관 활동만 하게 한다. 햇빛은 자외선이 무서워 쏘이면 안 되고 공기는 미세먼지와 코로나가 무서우니 직접 마시면 안 되고 흙은 더러워서 밟으면 안 되고 숲이나 풀에는 진디기와 해충이 있으니 들어가면 안 된다.
어른의 눈에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은 아이들이 다칠 수 있는 무서운 공간이다. 자연의 이치를 정면으로 가로막는 지금 우리의 교육은 올바른가?
우리 세대가 자연을 망쳤으니 다음 세대는 자연과 결별해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위험을 경험하면서 더 큰 위험에 대비하는 법을 배우면서 성장한다. 만약 과일 깎는 칼이 무서우니 칼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결국 그 아이는 칼을 사용할 수 없게 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우리와 달리 많은 나라들은 위험을 피하라 가르치지 않고 위험을 극복하는 법을 터득하도록 가르친다. 종일 숲 속에서 톱이나 칼등의 도구를 갖고 숲에서 놀도록 도와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위험성을 극복해 나간다.
한국적 온실 교육은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까?
이것의 뿌리는 조선의 귀족이었던 양반들의 교육방식에 있다. 그렇게 따지니 나의 생각이 어쩌면 사회에 역행하는지도 모르겠다.위험과 안전의 경계에서 여전히 과도하게 위험의 편에 서있음은 분명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