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
전에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었다. 그 책이 내가 기억하는 내 인생의 첫 철학책이었고 이번 '마흔에 읽는 니체'가 그 두 번째 철학 도서이다. 읽기 전에는 철학에 별로 흥미가 없었다. 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정말 ‘굳이’ 이렇게까지 생각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기 개발서와는 다른 가슴 깊이 울어 나오게 하는 철학만의 묘미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쇼펜하우어에 이어서 니체도 알아보고자 이 책을 골랐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에서도 니체가 간간히 언급되기도 했고 쇼펜하우어가 니체에 완전히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철학자라고 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니체의 사상도 궁금해졌고 가볍게 철학을 읽기 좋은 ‘마흔에 읽는’ 시리즈로 읽게 되었다.
1. 니체의 ”신은 죽었다 “란 말에는 참된 세계이자 신의 세계였던 ’저 세계‘를 사라지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세계이다.
‘신이 죽었다”라는 말은 너무나 유명해서 단지 이원론에 대항하기 위한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뜻과는 너무 달랐기에 더 기억에 남을만한 말 같다. 이원론으로 인해서 지금 살고 있는 현생이 속죄를 갚기 위한 시간이라고 여기고 현재의 삶에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의 삶보다는 죽어서 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기독교 사람들을 보면 매일 같이 바르게 살려고 하고 죄를 뉘우친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신의 존재로 인해서 우리의 현생의 삶은 행복하지 못하고 따라서 신은 강하게 말하자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신은 죽었다고 말했다. 내가 종교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이 말이 정말 가슴에 와닿았다. 과연 신으로 인해서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야 그것이 신의 의미이고 신의 덕이겠지만 그것조차 아니라면 신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신을 죽이고 우리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행복을 찾는 것이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니할리즘‘은 삶은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를 이르는 말이다.
1. 힘에의 의지가 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의미를 각인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의욕하는 바를 언제든 행하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의욕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
‘힘에의 의지’라는 말이 처음에는 문법상 말이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힘의 의지’가 맞는 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니체의 유명한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삶이 주인이 되어 그 이상을 이루면서 강해진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힘에의 의지를 항상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삶은 본인의 것이고 본인만이 주인이다. 따라서 하고자 한다면 무엇이든 억압받지 않고 해야 한다. 비록 나는 그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이 기회에 나도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무엇이든지 다 해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싶다.
2. 인간의 자유 의지를 긍정하는 철학에서는 무엇이든지 노력하면 다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 의지의 철학은 실패한 사람에게 ’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며 일방적으로 책임을 묻는다. 니체는 이러한 입장을 ’ 단죄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죄를 찾아낼 목적으로 고안되었다고 말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이라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변명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당신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라는 말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나도 솔직히 말하면 현재에 있어서는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감인지 기고만장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다소 우습지만 이런 자세를 고수하는 것이 본인의 자존감 지키는 것에 있어서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고 싶다. 만약 이런 마음가짐으로 시도를 하고 실패를 한다면 정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노력이 부족했기에 실패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최선을 다한 나는 매우 절망감을 느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겨내는 것도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그것까지가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내 노력 부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를 향한 비난이 될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한 것이든 스스로 나 자신에게 한 것이든 그것은 비난이 된다. 결국 잘잘못을 따지게 되는 것으로 비난을 할 필요는 없다. 뭐라고 비난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
’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상실하고 또다시 자신을 발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
3,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은 괴로운 이 삶에 다시 한번 최고의 의미를 부여하여 극복할지를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순간의 연속이다. 영원을 넘어지치지 않고 ‘다시 한번’을 외쳐보자
내가 지금 여기서 넘어지고 좌절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차피 내일은 오늘과 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고 포기한다면 빈 공간이 생긴 ’ 내 인생‘의 내일이 시작될 뿐이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순간의 연속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는 해당할 수는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저렇게 생각하면서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고 불행한 인생을 내가 끌어올리려는 이미지가 연상되기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매일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어떤 행동을 할지 생각하고 기대하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물론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중점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긍정적인 마음으로 내 인생은 행복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아무튼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하는 것이기에 넘어졌다고 해서 포기하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한번’을 외치면서 웃으면서 일어나야겠다.
4.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은 ‘판단중지’라는 의미로 에포케(epoch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상승에서 하강으로 하강에서 상승으로 전환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비가 몇 번 있을 수 있다. 그러다 우리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다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좌절하며 멈추기를 선택할 수 있다. 혹은 이 두 가지를 반복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실수하기 쉬운 것이 ‘멈춤’이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에포케를 하면서 멈추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은 상황과 마음가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상승하고 하강하는 데 있어서 본인의 신념이 강하고 굳게 믿는 뜻이라면 에포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그렇게 원하고 있는데 에포케 하는 시간조차 그 의지를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확신이 없다면 본인의 의지를 확인하고 잠시 멈춰서 고민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간혹 이렇게 고민한 시간이 더 부정적인 선택으로 이끌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무엇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 길이 확실시 되지 못했다면 잠시 멈춰서 무엇이 옳은지 에포케 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5. 사람들이 한 번 던지는 주사위는 우연의 긍정이고, 그것들이 떨어지면서 형서하는 조합은 필연의 긍정이라는 것이다. 필연은 우연을 긍정할 때 그 우연에 의해서 긍정된다.
운명은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 글에서는 우연이 곧 필연을 만들고 그 필연이 운명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운명조차 우연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에 필연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이 필연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의 글과 연관성 있게 표현하자면 우연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내 운명과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 운명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내 인생이 그저 한 번 던지는 주사위의 우연이라면 조금은 내 인생에 회의감이 찾아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필연을 긍정하면서 살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또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간다면 적어도 내 정신상태에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래의 문구와 같이 내 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스스로 성장하고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로마 공화정 말기의 뛰어난 정치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6.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야말로 가상의 세계이다. ’ 현재를 잡아라 ‘로 번역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 현실주의자 니체의 정신이다.
‘카르페 디엠’ 정말 지겹도록 들었던 문구이다. 어느 자기 개발서나 철학책이나 있는 문구 같다. 최근 들어서 가장 자주 들었던 문구이기에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그래도 독서를 하면서 이런 말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다. 사실 카르페 디엠을 외치다 보면 고민도 사라질 것이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걱정을 하느라 현실에 충실하지 못했고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고민은 어느 것 하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직접 맞닿지 않는다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영향을 줄 수 없다. 고민만 하더가 도 막상 부딪히면 달라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러기에 그냥 잠자코 마음속으로 ‘카르페 디엠’ 한번 외치고 하던 거나 하자.
7. 내면의 나와 만나기 위해서는 ’ 무리 본능‘에서 벗어나 고독한 길을 가야 한다.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에게 무리를 떠나는 것은 지난 인류의 DNA에 반하는 행동이다. 나도 우울해질 때는 혼자 있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같이 무엇이든 하다 보면 그 우울함이 조금은 가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울감을 느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무엇인가 뒤틀린 점이 있었다는 의미이고 다시 말해, 위기를 기회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한다. 우울할 때야말로 정말로 고독을 즐기면서 생각을 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고독을 즐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무엇인가 어색하다. 어디를 가든 누군가와 함께 가야 한다. 혼자 가기에는 무서운 것도 있지만 막상 혼자 고독을 느끼러 떠난다면 그 단어 자체로 고독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혼자 고독을 즐기를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고독이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란 혼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무엇을 하지 않고 본인만의 생각에 빠져서 시간을 보내는 고독이란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고독으로 내면의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점차 고독에 익숙해지고 고독함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장 생각하면서 읽으려고 했던 점은 니체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비교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와 다르게 니체는 책을 읽는 내내 ’ 자신을 극복하라 ‘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살자는 쇼펜하우어와는 대조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나의 경우에는 니체의 사상에 더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으로 살게 된다면 삶에 있어서 고통은 다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이 마냥 행복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 쾌감이라고는 말하나 그것조차도 행복이기에 연속적인 쾌감은 우리를 끝없는 경주에 놓게 할 수 있지만 니체의 사상을 가지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에서 오는 본인의 성장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성장함으로써 사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 역시 계속 고통을 마주하고 고스란히 느끼면서 극복하고 성장하고 싶다. 끊임없이 니체의 ’ 힘에의 의지‘를 생각하면서 성장하고 싶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니체의 유명한 저서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