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라는 허울은 인간의 이성을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해 주는 최고급 맞춤 정장과 같다. 수십 년간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군림해 온 자들은, 자신이 그 정장을 입고 있기에 우아하고 합리적인 인간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그 정장이 벗겨지고 사방이 적의로 둘러싸인 완벽한 고립 상태에 놓이는 순간, 인간의 뇌는 수십만 년 전 수렵 채집 시대의 원시적인 짐승으로 끔찍하게 퇴행하고 만다. 논리와 체면을 담당하던 전두엽의 스위치가 꺼지고, 오직 분노와 생존 본능만을 뿜어내는 편도체만이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오후 2시 35분.
35층 인사본부장실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서지안… 서지안 이 독사 같은 년… 죽여버릴 거야. 내 손으로 찢어 죽일 거야!”
최동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의 몰골은 한때 태성그룹의 최대 파벌을 이끌던 늙은 제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넥타이는 쥐어뜯겨 느슨하게 풀려 있었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광기로 번들거렸다.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의 오른손에 꽉 쥐여진 묵직한 아이언 골프채였다. 주말마다 상류층의 인맥을 다지기 위해 푸른 잔디밭에서 우아하게 휘두르던 그 비싼 금속 막대기가, 지금은 오직 살의만을 담은 원시적인 둔기로 전락해 있었다.
“본, 본부장님….”
복도에 몰려 있던 인사팀 직원들이 경악하며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자신들의 수장이 골프채를 들고 짐승처럼 헐떡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다 비켜!! 쳐다보지 마, 이 배신자 새끼들아!”
최동욱이 허공에 골프채를 붕붕 휘두르며 엘리베이터 홀을 향해 돌진했다. 직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의 뇌리에는 오직 단 하나의 목표물만이 각인되어 있었다. 22층 특별감사팀 집무실에 앉아, 이 모든 지옥도를 설계하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은 악마. 서지안.
자신의 충견이었던 기획실장 컴퓨터에 가짜 메모를 심어 자신을 이간질하고, 있지도 않은 횡령과 야반도주 찌라시를 사내에 유포해 자신을 범죄자로 낙인찍었으며, 사방의 통신망을 끊어 자신을 완벽한 독 안에 가둔 장본인.
‘내 명단, 내 비자금 장부. 그년이 다 쥐고 있어. 그년을 죽이고 그 서류들을 되찾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최동욱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주먹으로 미친 듯이 내리쳤다.
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는 짐승처럼 그 안으로 몸을 던지고는 22층 버튼을 눌렀다.
위잉거리며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동욱은 아이언 골프채의 차가운 금속 그립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입가에 거품을 문, 살의에 잡아먹힌 완벽한 괴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같은 시각. 22층 특별감사팀.
통유리창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지만, 특감팀 전체의 공기는 폭풍 전야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지안은 자신의 독립된 집무실에 앉아, 모니터에 띄워진 엘리베이터 씨씨티비 화면을 여유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붉은 숫자가 35에서 22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실장님. 괴물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손에 든 건 7번 아이언으로 보입니다.”
박 대리가 인터폰을 통해 다급하면서도 흥분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훌륭하네요. 7번 아이언이면 내 책상의 강화유리를 한 번에 박살 내기 아주 좋은 무게죠.”
지안은 책상 위를 완벽하게 정돈했다. 불필요한 서류들은 모두 서랍에 넣고 잠갔으며, 책상 한가운데에는 오직 최동욱의 이름이 적힌 얇은 서류철 하나만을 미끼처럼 툭 던져놓았다.
“박 대리. 지시한 대로 경찰에는 신고 들어갔겠죠?”
“네. 3분 전, 35층 인사팀 직원을 가장하여 ‘본부장이 흉기를 들고 22층 여직원들을 살해하러 내려갔다’고 다급하게 신고를 마쳤습니다. 관할 지구대에서 출동하면 늦어도 5분 안에는 로비에 도착할 겁니다.”
“타이밍이 아주 예술이네요. 다들 내가 지시한 동선대로 움직이세요. 절대로 최동욱을 물리적으로 막아서지 말고, 그가 골프채를 휘두르며 마음껏 내 방까지 들어오게 길을 활짝 열어주십시오. 카메라는 다각도로 돌려두는 거 잊지 말고요.”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단정하게 묶어 올렸던 머리칼을 슬쩍 풀어헤쳐 몇 가닥이 이마로 흘러내리게 만들었고, 입술의 붉은 립스틱을 티슈로 가볍게 문질러 창백하고 지친 안색을 연출했다. 방금 전까지 사냥감을 도살장으로 몰아넣던 냉혹한 이단심문관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겁에 질려 덜덜 떠는 가련하고 연약한 여직원의 얼굴이 완벽하게 세팅되었다.
상대를 파멸시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가장 폭력적인 살인 미수 현장의 피해자로 던져 넣는 끔찍한 연출.
“자, 어서 오세요. 본부장님.”
지안이 책상 뒤로 몸을 한껏 움츠리며 작게 속삭인 순간이었다.
띵-.
2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지안!!! 서지안 어딨어!!”
복도를 찢을 듯한 최동욱의 사자후가 특감팀 유리문을 넘어 쳐들어왔다.
쾅!
육중한 발길질에 특감팀 외부 사무실의 유리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으아악!”
“본, 본부장님! 왜 이러십니까!”
오 과장과 특감팀 요원들은 지안의 지시대로 혼비백산하는 완벽한 연기를 펼치며 책상 밑으로 숨거나 벽 쪽으로 물러섰다.
최동욱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사무실 안쪽, ‘특별감사팀장 서지안’이라는 명패가 붙은 반투명 유리 너머의 실루엣만을 향해 있었다.
“다 꺼져! 서지안, 이 악마 같은 년! 오늘 네년이랑 나랑 여기서 같이 죽는 거야!”
최동욱은 앞을 가로막는 파티션을 발로 걷어차고, 빈 의자를 골프채로 후려갈기며 지안의 집무실을 향해 돌진했다. 퍽! 와장창! 모니터가 깨지고 복사기가 나뒹굴었다. 특감팀 요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길을 터주자, 그는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지안의 집무실 문턱까지 다다랐다.
“나와! 당장 기어 나와!!”
최동욱이 쥐고 있던 아이언 골프채를 양손으로 치켜들고, 지안의 집무실 유리문을 향해 맹렬하게 휘둘렀다.
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두꺼운 반투명 유리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유리 파편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짐승의 숨소리를 내뿜는 최동욱이 산산조각 난 문틀을 밟고 집무실 안으로 난입했다.
“서, 서지안….”
최동욱의 시뻘건 동공이 집무실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책상 뒤편,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공포에 질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지안을 발견했다.
“보, 본부장님…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발 진정하세요….”
지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가녀린 어깨는 사시나무 떨리듯 요동쳤다. 누가 보아도 미치광이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노출된 불쌍하고 무력한 희생양 그 자체였다.
그 완벽한 굴복의 자세는 최동욱의 망가진 뇌에 기괴한 우월감과 살의를 동시에 폭발시켰다.
“진정? 진저어엉?! 네년이 감히 나한테 진정하라고 지껄여?!”
최동욱이 성큼성큼 다가가 지안의 책상을 골프채로 쾅 내리쳤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명패가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안은 “꺄악!” 비명을 지르며 벽 구석으로 더욱 몸을 웅크렸다.
“네년이 내 수족들을 다 잘라내고! 나를 회삿돈 훔쳐 달아나는 횡령범으로 만들어?! 내 금고에 있던 그 명단, 내 장부 당장 내놔! 당장 내놓으란 말이야!!”
“무, 무슨 명단을 말씀하시는지 저는 모릅니다! 본부장님, 이건 범죄입니다. 당장 골프채 내려놓으세요… 제발요….”
지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처박힌 척하면서도, 책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 ‘최동욱 서류철’을 교묘하게 힐끗거리고 있었다.
최동욱의 시선이 지안의 눈길을 따라 책상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놓인 얇은 서류철의 제목을 읽는 순간, 그의 이성은 마지막 한 조각마저 산산이 조각났다.
[인사본부장 최동욱 비위 및 채용 비리 고발장]
“이… 이 개새끼가! 모른다고? 모른다고오?!!”
자신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그 서류를 보는 순간, 최동욱은 짐승의 포효를 내지르며 책상 위로 달려들었다. 그는 서류철을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흩뿌리고는, 다시 골프채를 치켜들고 지안을 향해 다가갔다.
“네년이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내가 이 태성그룹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네깟 년이 감히 나를 병신으로 만들어?!”
“살, 살려주세요! 본부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세요!”
지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필사적으로 두 손을 모아 빌었다.
하지만 구석에 몰린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틈 사이로 오직 최동욱에게만 보이는 서늘하고 조롱 섞인 뱀의 미소가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내려쳐. 내 이마든 어깨든, 그 쇳덩어리로 후려갈겨봐. 네가 그걸 휘두르는 순간 너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지옥으로 처박힐 테니까.’
지안의 도발에 완전히 잡아먹힌 최동욱은, 눈앞의 이 악마 같은 여자의 머리를 부숴버리겠다는 생각 하나로 아이언 골프채를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죽어! 죽어버려어어!!”
근육이 팽창하고 핏대가 솟은 최동욱의 두 팔이 허공을 가르고 무자비하게 아래로 떨어지려는 찰나.
“경찰입니다! 당장 흉기 버리고 손 머리 위로 올려!!”
집무실 밖 복도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호통 소리와 함께, 방검복을 입고 삼단봉을 빼 든 경찰관 너댓 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1층 로비를 통해 긴급 출동한 관할 지구대의 타격대였다. 특감팀 요원들이 경찰의 진입 경로를 완벽하게 열어둔 덕분에, 그들은 최동욱이 골프채를 치켜든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살인 미수의 순간에 정확히 현장을 덮칠 수 있었다.
“흉기 버려! 당장 엎드려!!”
경찰관들이 테이저건을 겨누며 최동욱을 향해 포위망을 좁혔다.
“이… 이건 음모야! 저년이 나를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저년이 악마야!!”
최동욱이 골프채를 쥔 채 침을 튀기며 발악했지만, 경찰의 눈에 비친 상황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산산조각 난 유리문, 박살 난 집기들, 그리고 벽 구석에 몰려 눈물범벅이 된 채 벌벌 떨고 있는 연약한 여직원과, 흉기를 든 채 광분하고 있는 중년의 사내.
“진정하시고 흉기 버리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비켜! 다 비켜! 저년부터 죽이고 갈 거야!!”
이성을 잃은 최동욱이 경찰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안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딛는 순간.
탕-!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테이저건의 전극이 최동욱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혔다.
“크아아악!!”
5만 볼트의 전류가 전신을 강타하자, 거구의 늙은 코끼리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으며 바닥으로 처박혔다. 덜그럭 소리를 내며 그가 쥐고 있던 골프채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경찰관들이 즉각 달려들어 발작하는 최동욱의 등 위로 올라타 거칠게 수갑을 채웠다.
“최동욱 씨, 특수 폭행 및 살인 미수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채 수갑이 채워지는 태성그룹의 인사본부장.
수십 년간 사내의 모든 임직원을 제 발밑에 두고 군림했던 절대 권력의 제왕이, 일개 여직원의 치밀한 심리전에 말려들어 스스로 흉기를 들고 폭주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경찰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바닥에 웅크린 지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안은 경찰의 부축을 받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에서는 여전히 서러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온몸은 극도의 공포에 질린 듯 가엽게 떨리고 있었다.
“흐윽… 무, 무서웠어요…. 갑자기 본부장님이 쳐들어오셔서… 제가 감사 업무를 똑바로 했다고 죽이겠다고… 흑….”
지안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완벽한 오열을 쏟아냈다.
하지만, 손가락 틈새로 살짝 드러난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는 바닥에 처박혀 짐승처럼 헐떡이는 최동욱을 아주 고요하고 서늘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짓된 프로파간다로 군중을 선동하고, 사냥감의 이성을 마비시켜 스스로 파멸의 도끼를 쥐게 만든 완벽한 예술 작품. 무균실의 지배자는 경찰이라는 합법적인 칼날까지 완벽하게 동원하여, 성역을 가장 처참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도륙하는 데 성공했다.
처형대 위에서 펼쳐진 피비린내 나는 왈츠가, 마침내 서지안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