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가장 우아한 협상

by 연구소장

권력을 쥔 수컷들이 범하는 가장 흔하고도 역겨운 착각이 있다.


자신이 쥔 지폐와 직함의 두께가 곧 자신의 매력이라고 믿는 것. 그래서 그들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타인, 특히 젊고 유능한 여성을 대할 때 아주 쉽게 물리적, 언어적 경계를 침범하곤 한다.


그것은 단순한 욕정을 넘어선, ‘나는 너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만질 수 있다’는 오만하고도 폭력적인 권력의 과시다. 그 불쾌한 손길을 거부하는 순간 사내에서 미운털이 박혀 도태된다는 것을 알기에, 수많은 약자들은 그저 영혼을 죽인 채 억지웃음으로 그 끔찍한 시간을 견뎌낸다.


서지안 역시 그 지옥 같은 권력형 성희롱의 굴레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그 역겨운 수컷들의 습성을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용하는 포식자였다. 그들이 뻗어오는 더러운 손길을 가장 우아한 미소로 받아주며 안심시키는 사이, 그녀는 그들의 목을 썰어버릴 가장 날카로운 단두대를 세우고 있었으니까.


월요일 오전 10시. 본사 32층 부사장 집무실.


최동욱 인사본부장이 횡령 및 살인 미수 혐의로 구속된 지 사흘이 지난 아침. 태성그룹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거대한 파벌이 무너진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지안은 오늘부로 22층 특별감사팀장의 직함을 내려놓고, 그룹의 심장부인 전략기획실 부실장으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


“서 실장, 아니 이제 서 부실장이지. 이리 좀 가까이 와 봐.”


넓은 마호가니 책상 뒤에 앉아 있던 부사장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채 지안을 불렀다. 지안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블랙 수트 차림으로 부사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부사장님.”


“최동욱이 그 늙은 구렁이 새끼가 주말 내내 유치장에서 지 발악을 하더군. 자기는 함정에 빠진 거라고, 서지안이 모든 걸 조작했다고 경찰한테 아주 소설을 썼다지 뭐야. 큭큭.”


부사장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안의 곁으로 다가와, 끈적하고 두꺼운 손으로 지안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순간, 지안의 등골을 타고 뱀이 기어가는 듯한 지독한 혐오감이 솟구쳤다. 향수 냄새에 섞인 늙은 사내의 퀴퀴한 체취. 부사장의 손은 지안의 어깨를 주무르듯 쓰다듬더니, 노골적으로 그녀의 목덜미와 등줄기를 향해 느릿하게 내려왔다.


“얼굴만 반반한 줄 알았더니, 속에는 아주 지독한 호랑이가 한 마리 들어앉아 있었어. 나를 위해 기꺼이 자기 피를 묻히고 살인 미수의 희생양 연기까지 해내다니. 내 평생 이렇게 예쁘고 독기 품은 사냥개는 처음 봐.”


격려를 가장한 명백한 성추행이자 모멸적인 언사였다.


부사장은 지안이 이루어낸 압도적인 성과조차 ‘주인을 위해 재롱을 부린 예쁜 사냥개’의 공로로 격하하고 있었다. 그에게 지안은 머리 좋은 도구이자, 언제든 성적으로 희롱하고 주무를 수 있는 소유물에 불과했다.


“서 부실장. 이제 22층 골방에서 썩을 필요 없어. 내 옆에 아주 착 붙어서,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부사장의 손이 지안의 허리춤까지 뱀처럼 미끄러져 내려왔을 때.


지안은 그 역겨운 손을 매몰차게 쳐내는 대신,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부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영광입니다, 부사장님. 저를 발탁해 주신 은혜, 부사장님의 곁에서 평생 몸과 마음을 다해 갚겠습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아주 똑똑해.”


부사장은 지안의 완벽한 복종에 만족한 듯 크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한 번 꽉 움켜쥐고는 손을 거두었다.


“가 봐. 짐 챙겨서 전략기획실로 올라가야지. 이따 저녁에 임원진 환영 회식 자리가 있으니까, 옷 예쁘게 입고 내 옆자리에 앉고.”


“네. 이따 뵙겠습니다.”


지안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온 순간. 지안의 얼굴에 걸려 있던 그 아름답던 미소가, 마치 유리가 깨지듯 섬뜩하게 박살 났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부사장이 만졌던 어깨와 허리춤을 신경질적으로 벅벅 닦아냈다. 마치 오물이나 방사능 폐기물이 묻은 것을 털어내려는 듯, 그녀의 눈빛에는 짙은 구역질과 살기가 뚝뚝 묻어났다.


‘천박하고 역겨운 새끼. 그 더러운 손목을 산 채로 썰어서 네놈 입에 쑤셔 넣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오만한 늙은 수컷들의 그 비릿한 시선과 끈적한 손길. 지안이 권력의 정점을 향해 기어오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감히 자신을 사냥개나 노리개 취급하는 그 혐오스러운 벌레들을, 자신의 발밑에 꿇어앉혀 벌레처럼 짓밟아 터뜨리기 위해서.


그때, 지안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태성그룹 대표이사(CEO)의 비서실장이었다.


[서지안 부실장님. 대표이사님께서 지금 40층 집무실에서 독대를 원하십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조용히 올라오십시오.]


지안의 서늘한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였다.


태성그룹의 상징적인 오너가 부사장이라면, 대표이사는 그룹의 모든 실무와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는 진짜 권력의 뇌수(腦髓)였다. 부사장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평생을 약육강식의 기업 생태계에서 살아남은 가장 늙고 교활한 포식자.


그가 자신을 불렀다.


그것도 부사장 몰래.


“타이밍 한 번 완벽하네.”


지안은 구겨진 옷매무새를 칼같이 정돈하고, 가장 차갑고 이성적인 전사의 얼굴을 한 채 40층으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본사 40층 대표이사 집무실.


거대한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고요하고 압도적인 공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에는, 은발을 깔끔하게 뒤로 넘긴 60대 후반의 대표이사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지안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대표이사는 천천히 몸을 돌려 매의 눈으로 지안을 훑어내렸다. 그의 시선은 부사장의 그것처럼 끈적하거나 천박하지 않았다. 오직 이 물건이 나의 칼로 쓰기에 적합한 강도를 가졌는지를 재보는, 철저하고 차가운 계산가의 눈빛이었다.


“서지안. 전략기획실 부실장 승진을 축하하네. 우리 태성그룹 역사상 최연소 여성 임원이 탄생했군.”


“모두 대표님과 부사장님께서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겸손 떨 것 없어.”


대표이사는 걸음을 옮겨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지안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송태섭 부장, 백도훈 전무, 그리고 최동욱 본부장까지. 불과 몇 달 만에 태성그룹의 골칫거리였던 세 명의 굵직한 임원을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완벽하게 도륙한 건, 자네의 그 소름 돋는 재능 덕분이니까.”


지안은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대답을 피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침묵. 그것이 가장 우아한 긍정임을 대표이사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대표이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는 최동욱 본부장이 정말로 500억을 횡령해서 러시아로 야반도주하려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놈은 그럴 위인이 못 되거든. 비자금을 모은 건 사실이겠지만, 도망을 칠 만큼 배짱이 두둑한 놈은 아니지.”


늙은 황제의 날카로운 통찰력. 그는 경찰과 부사장, 그리고 수만 명의 군중이 속아 넘어간 그 거대한 프로파간다의 이면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자네가 기획실장의 컴퓨터에 덫을 놓고, 사내에 찌라시를 뿌려서 최동욱을 미치게 만들었지. 그리고 그가 제 발로 흉기를 들고 뛰쳐나오게 만들어 경찰의 손에 넘겼어. 아주 완벽하고 악랄한, 극장형 사기극.”


대표이사의 입에서 나온 섬뜩한 진실 앞에서도 지안의 눈동자는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는 더욱 짙고 매혹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제가 그룹의 품격을 훼손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안이 부드럽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표이사는 허, 하고 짧은 실소를 터뜨렸다.


“아니. 나는 자네의 그 악마 같은 효율성을 높이 평가하네. 위기를 관리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위기 자체를 통제할 수 있는 환상으로 조작해 버리는 것이니까.”


대표이사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지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부사장은 자네를 그저 자기 말을 잘 듣는, 똑똑하고 앙칼진 사냥개 정도로 생각하겠지. 적당히 먹이를 던져주고, 기분 내킬 때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데리고 놀기 좋은 애완견 말이야.”


부사장의 더러운 본성을 정확히 꼬집는 말. 지안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하지만 나는 자네의 눈에서 다른 걸 봤어. 자네는 누군가의 목줄에 매여 있을 종자가 아니야. 목줄을 쥔 자의 손목을 물어뜯고 결국 그 자리에 올라설 포식자지.”


대표이사는 서랍을 열어, 붉은색 결재 도장이 찍힌 서류철 하나를 지안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전략기획실 부실장이라는 자리는 그저 허울 좋은 타이틀일 뿐이야. 내가 자네에게 진짜로 주려는 건, 이 태성그룹 전체의 현금 흐름과 인사 감사권을 합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 통제 권한’이네.”


지안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승진이 아니라, 회사의 모든 부서를 합법적으로 감찰하고 예산을 동결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저에게 이런 거대한 권력을 주시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안이 차갑게 묻자, 대표이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부사장. 그 오만하고 무능한 인간이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꼴을 막아달라는 뜻이네.”


태성그룹 내부에 숨겨진 가장 깊은 권력 투쟁.


전문 경영인으로서 평생을 바쳐 그룹을 키워온 대표이사는, 오너 일가라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물려받으려 하며 사내에 온갖 불쾌한 짓(여직원 성희롱, 무리한 낙하산 인사 등)을 일삼는 부사장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부사장은 자네를 맹신하고 있지. 자네가 내미는 서류라면 똥이라도 된장인 줄 알고 서명할 거야. 그러니 자네가 부사장의 곁에서, 그 인간이 스스로 무덤을 파도록 가장 달콤하고 완벽한 함정을 설계해 주게. 최동욱을 찢어 발겼던 그 환상적인 연금술로 말이야.”


사냥개의 목줄을 쥔 주인을 물어 죽이라는, 또 다른 지배자의 은밀한 청부.


이것이야말로 지안이 가장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부사장의 방패막이를 벗어나, 그를 합법적으로 찢어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검(劍)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권한 위임장에 우아하게 서명했다.


“가장 완벽하고 끔찍한 무대를 세팅해 보죠. 부사장님이 이 태성그룹의 꼭대기에서, 가장 비참하고 냄새나는 오물통으로 추락할 수 있도록.”


지안은 서류를 챙겨 들고 돌아섰다.


“아, 그리고 대표님.”


문손잡이를 잡기 전, 지안이 고개를 살짝 돌려 나긋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저를 대하실 땐, 사냥개니 뭐니 하는 저급한 비유는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누군가의 개가 아니라, 이 거대한 무균실을 설계하는 지배자니까요. 제가 대표님의 손을 잡은 건 복종이 아니라, 아주 우아한 ‘협상’을 한 것뿐입니다.”


오만한 대표이사의 눈동자가 순간 일그러졌지만, 지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장 매혹적인 미소와 함께 40층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새로운 집무실인 전략기획실 부실장실에 도착한 지안.


넓고 화려한 공간,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창.


그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프라이빗 세면대로 향했다.


수도꼭지를 틀고 최고급 핸드워시를 짜내어, 아침에 부사장이 만졌던 어깨와 허리춤, 그리고 손을 붉어질 때까지 박박 씻어내기 시작했다.


차갑게 쏟아지는 물줄기 위로, 아침에 부사장이 뱉었던 역겨운 말들이 겹쳐 들렸다.


‘내 옆에 아주 착 붙어서, 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란 말이야.’


지안은 핏발 선 눈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직급이 낮다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폭력과 희롱들. 그 더러운 손길을 참고 우아한 미소로 화답해야 했던 굴욕의 시간들은 오늘부로 완벽하게 끝났다.


“벌레 새끼….”


지안은 수건으로 손을 거칠게 닦아내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네놈의 그 더러운 혓바닥과 손목을 전부 도려내서, 네가 쌓아 올린 이 태성그룹이라는 제국과 함께 시궁창에 처박아 줄 테니까.”


송태섭, 백도훈, 최동욱.


지금까지 지안이 찢어 발긴 자들은 모두 이 마지막 사냥을 위한 워밍업에 불과했다.


자신을 사냥개로 부리며 성적인 모멸감을 안겨주었던 진짜 제왕.


가장 거대하고 역겨운 짐승의 목을 베어내어, 피 묻은 왕관을 자신의 머리 위에 쓰기 위한 서지안의 서늘하고도 잔혹한 마지막 왈츠가 웅장한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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