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사냥개의 반란

by 연구소장

권력의 생태계에서 가장 위태로운 존재는 적의 심장부에 칼을 꽂은 맹장이 아니다. 주인의 지시를 받고 적의 목줄을 가장 잔혹하고 깔끔하게 물어뜯은, 지나치게 유능한 사냥개다.


사냥이 계속될 때는 그 날카로운 이빨이 주인의 가장 든든한 무기가 되지만, 숲속의 짐승들이 모두 정리되고 사방에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 주인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발밑에 엎드린 사냥개의 턱주가리를 향하게 마련이다. 저 맹수가 어느 날 갑자기 배가 고프다며 내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어쩌나 하는, 아주 원초적이고도 본능적인 공포.


그것이 바로 수천 년간 반복되어 온 ‘토사구팽’의 심리학이다. 그리고 태성그룹의 절대 권력자 부사장 역시, 그 얄팍하고 이기적인 수컷의 본능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었다.


목요일 오전 10시. 본사 32층 부사장 집무실.


전날 밤 강남 요정에서의 지독한 숙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부사장은, 핏발 선 눈으로 책상 위에 놓인 태성그룹 임원 조직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붉은 펜으로 엑스 자가 그어진 세 명의 이름. 재무팀 송태섭 부장, 미래전략 R&D 센터 백도훈 전무, 그리고 인사본부장 최동욱 전무.


모두 부사장이 그룹을 온전히 장악하는 데 눈엣가시 같았던 거물들이었다. 그들이 사라진 지금, 사내의 모든 파벌은 숨을 죽였고 이사회는 부사장의 눈치만 살피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부사장은 마침내 자신이 진정한 태성그룹의 주인이 되었다는 쾌감에 젖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지독하게 찜찜했다.


어젯밤 요정에서 서지안의 허벅지를 주무르다 우연히 마주쳤던 그 서늘한 눈빛. 충견의 눈빛이 아닌, 도축업자의 그것과도 같았던 그 섬뜩한 안광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비서실장.”


부사장이 인터폰을 누르자 비서실장이 즉각 방으로 들어왔다.


“어젯밤에 내가 지시한 서지안 부실장의 뒷조사, 어떻게 됐어.”


“네, 부사장님. 인사팀의 남은 실무진들을 은밀하게 쪼아서 서 부실장의 과거 이력부터 최근 특감팀 시절 결재 내역, 심지어 개인적인 자금 흐름까지 싹 다 뒤져봤습니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부사장은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뜯어 서류를 훑어내렸다.


“그래서? 꼬투리 잡을 만한 게 뭐가 나왔어. 법인카드를 허투루 썼다거나, 밑에 애들한테 뽀찌를 받았다거나, 아니면 외부 업체랑 붙어먹은 흔적이라도.”


“그게….”


비서실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습니다.”


“뭐? 그게 말이 돼?!”


부사장이 서류를 책상에 내동댕이쳤다.


“특감팀을 이끌면서 그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렀는데 뒤로 해 먹은 게 하나도 없다고? 사람 새끼면 권력의 단맛을 봤을 때 무조건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어! 제대로 판 거 맞아?!”


“수차례 교차 검증을 했습니다만… 서 부실장은 법인카드조차 정해진 한도의 절반도 쓰지 않았고, 협력업체와의 미팅 기록은 모두 투명하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야말로 기계 같은 이력입니다.”


부사장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한기가 기어올랐다.


아무런 약점이 없다는 것. 그것은 권력자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징조였다. 돈, 여자, 도박, 명예욕.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더러운 욕망의 꼬투리가 하나쯤은 있어야 목줄을 쥐고 흔들 수 있는데, 서지안은 완벽한 무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년은 분명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다. 내가 최동욱을 칠 때 그년한테 전권을 위임해 줬지. 그때 분명히 선을 넘는 불법적인 짓들을 저질렀을 텐데, 증거를 너무 완벽하게 지운 거야.’


부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서성였다.


불과 몇 달 만에 거물 셋을 날려버린 서지안의 그 악마 같은 통제력과 심리전. 처음에는 자신을 위해 칼춤을 추는 그녀가 예쁘고 기특했지만, 이제 그 춤판이 모두 끝난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피 묻은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눌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서지안이 대표이사 영감탱이와 손을 잡는다면? 나를 죽이고 지가 이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든다면?’


전두엽을 잠식한 피해망상. 부사장은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위험해. 너무 커버렸어. 그년이 더 이상 내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독니를 뽑고 손발을 잘라내야겠어. 완전히 무력한 허수아비로 만들어서 내 옆에 애완견처럼 묶어둬야지.”


사냥개의 목을 칠 주인의 변심이 완벽하게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본사 39층 전략기획실 산하 ‘특별정보통제팀’ 사무실.


32층의 부사장이 의심과 공포에 찌들어가는 동안, 39층의 공기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서지안이 끌고 올라온 7명의 친위대원들은, 최근 며칠 사이 자신들의 삶을 통째로 뒤바꿔놓은 막대한 부의 쾌감에 흠뻑 취해 있었다.


오 과장은 휴게실 소파에 거만하게 기대앉아, 강남구 대치동의 초고가 아파트 평면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과장님, 그건 뭡니까? 이사 가시려고요?”


맞춤 정장으로 빼입고 손목에 번쩍이는 스위스 명품 시계를 찬 박 대리가 다가와 물었다. 해커 출신답게 늘 후드티만 뒤집어쓰고 다니던 꾀재재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 이번에 장만했어. 30억짜리. 대출 한 푼 안 끼고 전액 현찰로 박아버렸지.”


오 과장이 껄껄 웃으며 브로슈어를 내려놓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전세자금 대출 이자에 허덕이며 처가 식구들의 은근한 무시를 견뎌야 했던 평범하고 찌질한 40대 가장이었다. 하지만 지안이 하사한 1킬로그램짜리 황금 골드바 5개. 환전하고 세탁하여 통장에 꽂힌 그 압도적인 현금은 오 과장의 인생을 단숨에 구원했다.


“우리 장모님이 어제 집 계약서 보더니 기절하시려 하더라니까. 사위가 갑자기 무슨 재벌이라도 된 줄 알고, 아주 굽신거리시는데… 크으, 돈이 최고야 진짜.”


“과장님은 스케일도 크십니다. 저는 뭐, 소박하게 차 한 대 뽑았습니다.”


박 대리가 주머니에서 포르쉐의 매끈한 차 키를 꺼내 빙글빙글 돌렸다.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5명의 팀원들 역시 빚을 갚고, 명품 백을 쓸어 담고, 가족들에게 거액의 용돈을 뿌리며 자본주의의 정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도덕적 죄책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고한 백도훈을 정신병동에 처넣고, 최동욱을 횡령범으로 조작해 감옥에 보낸 대가로 얻은 피 묻은 돈이었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태성그룹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위기관리 보상’으로 완벽하게 합리화했다.


자본은 인간의 양심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마비시키는 마취제다.


이제 7명의 팀원들은 태성그룹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막대한 부와 권력을 하사한 단 한 명의 여왕, 서지안에게 자신의 영혼을 완벽하게 저당 잡힌 광신도들로 부화해 있었다.


딸깍.


집무실 문이 열리며 지안이 안으로 들어섰다.


“다들 아침부터 기분들이 좋아 보이네요.”


지안의 등장에, 낄낄거리며 수다를 떨던 7명의 팀원들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부실장님 오셨습니까!”


군대의 의장대 사열을 방불케 하는 완벽한 복종의 자세였다.


지안은 그들의 눈빛에 서린 탐욕과 충성심을 흡족하게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편하게 앉으세요. 다들 지난번 보상은 쏠쏠하게 즐기고들 있습니까?”


“실장님 덕분에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제 목숨을 실장님께 바치겠습니다!”


오 과장이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지안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그 평화로운 인생을 앞으로도 계속 즐기고 싶다면,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세요. 썩은 동아줄을 끊어내고 진짜 황금줄을 붙잡아야 할 때가 왔으니까요.”


지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박 대리와 오 과장을 비롯한 팀원들이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내려지고 문이 굳게 닫혔다.


“오늘 아침, 제가 32층 부사장실 비서 라인에 심어둔 정보원으로부터 흥미로운 첩보를 하나 받았습니다.”


지안이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부사장이 제 뒤를 캐고 있더군요. 특감팀 시절의 제 결재 내역과 자금 흐름을 전부 샅샅이 뒤졌답니다.”


“네?! 부사장님이 왜 부실장님을….”


“토사구팽(兎死狗烹)이죠.”


지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단어가 떨어졌다.


“최동욱이라는 거대한 방해물이 사라졌으니, 이제 그 피 묻은 칼을 쥐고 있는 제가 두려워진 겁니다. 머지않아 부사장은 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명분을 만들어 저의 손발을 자르려 들 겁니다. 즉, 여러분 7명을 강제로 해체하고 저를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뜻이죠.”


팀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강제 해체. 그것은 곧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 압도적인 부와 권력이, 39층의 안락한 둥지가 하루아침에 뺏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황금의 맛을 알아버린 자에게 원래의 비루한 삶으로 돌아가라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부, 부실장님… 그럼 저희는 어떡해야 합니까? 부사장님이 작정하고 저희를 치려 한다면 막을 방법이….”


“누가 막는다고 했습니까?”


지안의 차가운 눈동자가 팀원들을 하나하나 꿰뚫어 보았다.


“방어는 패배자나 하는 짓입니다. 주인이 사냥개의 목줄을 조이려 든다면, 사냥개는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됩니다.”


지안은 터치패드를 조작해 대형 스크린에 부사장의 거대한 사진을 띄웠다.


“박 대리. 어젯밤 요정에서 내가 룸에 설치해 두었던 도청기, 그 안에 담긴 부사장의 음성 파일 분석은 끝났습니까.”


박 대리가 재빨리 태블릿을 조작했다.


“네. 충격적이었습니다. 부사장이 술에 취해 임원들과 떠들어댄 내용 중에는, 하청업체로부터 받은 비자금을 스위스 차명 계좌로 빼돌린 정황과 더불어… 심지어 40층 대표이사님을 몰아내기 위해 언론에 허위 스캔들을 뿌리겠다는 구체적인 모의까지 담겨 있었습니다.”


지안이 나긋하게 웃었다.


“대표이사 영감을 치기 위한 음모라. 아주 훌륭한 무기네요.”


지안은 팀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부사장은 오너 일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회사를 날로 먹으려 드는 기생충입니다. 그가 태성그룹의 왕좌에 앉는 순간, 우리는 모두 쓰다 버려지는 소모품이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그의 숨통을 끊고 대표이사 쪽으로 힘을 실어준다면… 이 태성그룹의 진정한 지배자는 우리가 되는 겁니다.”


반역의 선포.


일개 직원들이 그룹의 차기 오너를 도륙하겠다는 미친 짓. 하지만 7명의 광신도들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탐욕과 살의로 눈을 번뜩였다.


“부실장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지옥이라도 따르겠습니다! 당장 부사장의 스위스 계좌부터 해킹해서 탈탈 털어버리겠습니다!”


“저도 영업본부 쪽 인맥 동원해서 부사장이 룸살롱에서 뿌린 법인카드 내역 싹 다 긁어모으겠습니다!”


사냥개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을 확인한 지안은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집무실 책상 위 명패 옆에 놓여 있던 지안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부사장’이었다.


지안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어 팀원들을 조용히 시키고는, 목을 가다듬고 세상에서 가장 공손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부사장님. 서지안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짐짓 다정함을 가장한 부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서 부실장. 바쁜가? 시간 되면 지금 32층 내 방으로 좀 내려오지. 전략기획실 조직 개편 문제로 아주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조직 개편. 부사장이 칼을 빼 들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지안의 붉은 입술이 소름 돋을 정도로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부사장을 향한 살의를 완벽하게 숨긴 채, 꿀이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부사장님.”


오전 11시. 본사 32층 부사장 집무실.


지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부사장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시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젯밤 요정에서 보여주었던 끈적한 호색한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권력자 특유의 차갑고 계산적인 낯빛만이 남아 있었다.


“앉아, 서 부실장.”


지안은 다소곳하게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어제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부사장이 시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운을 뗐다.


“서 부실장이 최근까지 특감팀을 이끌면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지. 송태섭, 백도훈, 최동욱. 그 굵직한 사건들을 피 튀기며 처리하느라 심신이 많이 지쳤을 거야.”


“모두 부사장님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알지, 알아. 그래서 내가 서 부실장에게 제대로 된 휴식과 영광을 주려고 해.”


부사장은 테이블 위로 서류 한 장을 툭 밀어 던졌다.


“전략기획실 산하에 있는 특별정보통제팀. 그 7명의 인원을 내일부로 각 계열사 감사팀으로 뿔뿔이 분산 배치할 거야. 그 녀석들도 그동안 험한 일 많이 했으니, 이제 각자 편안한 부서에서 승진해서 쉬게 해줘야지.”


표면적으로는 영전(榮轉)을 빙자한 부서 해체. 지안의 수족을 완벽하게 잘라내어 흩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서 부실장.”


부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지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 부실장은 이제 내 곁에서, 그런 더러운 감사 업무나 정보 수집 같은 데 손 떼고 대외적인 ‘그룹 홍보와 대관 업무’에 집중해. 명색이 그룹 최초의 최연소 여성 임원인데, 피 묻히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우아하게 내 얼굴마담 역할을 해달란 뜻이야.”


전략 통제 권한의 박탈.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뽑아버리고, 기껏해야 언론이나 상대하는 예쁜 인형으로 전락시키겠다는 노골적인 토사구팽의 선고였다.


부사장은 서지안이 반발하거나 당황할 것이라 예상하고, 속으로 어떻게 밟아줄지 계산하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지안의 얼굴에는 당황함이나 분노의 기색이 단 1그램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벅찬 은혜를 입은 사람처럼,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부사장님… 저와 제 팀원들을 그렇게까지 깊이 배려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안은 눈시울마저 살짝 붉히며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7명의 팀원들은 내일부로 즉각 부사장님 뜻대로 재배치 명단을 올리겠습니다. 저 역시 부사장님의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그림자가 되어, 대외적으로 부사장님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지안의 완벽하고도 순종적인 항복.


부사장은 순간 멈칫했다. 이렇게 저항 한 번 없이, 쥐여준 권력을 고분고분 내려놓는다고? 어젯밤에 느꼈던 그 섬뜩한 육감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굴종이었다.


‘그래, 기집애가 별수 있겠어. 감히 내 앞에서는 기어오르지 못하지.’


의심을 걷어낸 부사장은 그제야 거만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 그래, 역시 우리 서 부실장은 똑똑해. 내 마음을 아주 잘 알아준단 말이야. 나가서 인수인계 준비해.”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지안은 정중하게 90도로 인사를 올리고 부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육중한 문이 닫히고, 32층의 복도로 홀로 걸어 나온 서지안.


가련하고 순종적이던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옥에서 갓 벼려낸 듯한 얼음장 같은 살기와 경멸이 꽉 들어찼다.


“오만하고 역겨운 새끼. 내 발톱을 뽑았다고 안심하고 있겠지.”


지안은 뚜벅뚜벅 복도를 걸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해커 박 대리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수족이 잘리기 전에, 내일 밤까지 사냥감의 숨통을 물어뜯을 완벽한 덫을 세팅하세요.]


전면전의 막이 올랐다.


늙은 사냥꾼은 자신의 사냥개가 꼬리를 내렸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 맹견은 이미 독니를 품은 채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한 도약을 시작한 상태였다. 태성그룹 최상층을 피로 물들일 가장 잔혹한 반란이 마침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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