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피 묻은 왕관

by 연구소장

왕관의 무게를 견디려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 금속에 스며든 지독한 피비린내마저 사랑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하게 세공된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 뼈대는 누군가의 시체와 절망 위에서 세워지기 마련이다. 태성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 전략기획실의 2인자 자리에 오른 서지안의 머리 위에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찬란하고도 잔혹한 왕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녀는 송태섭, 백도훈, 최동욱이라는 세 명의 거물을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처형대 위로 밀어 올렸다. 사내의 모든 임직원들은 이제 22층에서 올라온 이 젊고 아름다운 여성 임원을 경외와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우러러보았다.


하지만 지안의 사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지금까지의 도륙은 오직 단 하나의 진짜 사냥감을 완벽한 도마 위에 올리기 위한 길고 지루한 전채 요리에 불과했다.


수요일 오전 9시. 본사 39층 전략기획실.


새롭게 단장된 부실장 집무실은 40층의 대표이사와 32층의 부사장실을 잇는 권력의 대동맥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지안은 넓은 창밖으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등 뒤에 일렬로 도열한 일곱 명의 사냥개들을 맞이했다.


그녀가 22층 특별감사팀에서 통째로 끌고 올라온 7명의 친위대.


이제 그들의 소속은 ‘전략기획실 산하 특별정보통제팀’이라는, 더욱 은밀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림자 부서로 격상되어 있었다.


“다들 새 사무실은 마음에 듭니까.”


지안이 돌아서며 나긋하게 묻자, 오 과장과 박 대리를 비롯한 팀원들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실장님, 아니 부실장님 덕분에 저희 같은 실무진들이 그룹의 최고층 공기를 다 마셔봅니다.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지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여러분이 지난 사냥에서 보여준 맹목적인 충성심에 대한 정당한 대가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권력은 쟁취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죠.”


지안은 터치패드를 조작해 집무실 벽면의 대형 스크린을 켰다. 스크린에는 태성그룹의 복잡한 지분 구조와 자금 흐름도, 그리고 그 정점에 군림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사진이 떠올랐다.


태성그룹 부사장.


“우리의 다음, 그리고 마지막 타겟입니다.”


지안의 서늘한 선고에 팀원들의 숨이 일순간 턱 막혔다.


지금까지 그들이 쳐낸 임원들은 어디까지나 부사장의 정적들이거나 눈엣가시들이었다. 부사장의 암묵적인 동의와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한 사냥이었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에게 권력을 하사한 진짜 주인이자 태성그룹의 차기 오너를 물어 죽이겠다는 선언이었다.


“부, 부실장님. 부사장님은 명실상부한 그룹의 후계자입니다. 저희가 그분의 뒤를 캔다는 사실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오 과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지안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두렵습니까? 고작 1킬로그램짜리 황금 몇 개에 배가 불러서, 진짜 태성그룹의 금고를 통째로 집어삼킬 기회를 포기할 만큼 멍청한 사냥개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안의 도발적인 한마디에 팀원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요동쳤다.


“어제 대표이사님께서 저에게 전략 통제 권한을 일임하셨습니다. 부사장의 목을 합법적으로 칠 수 있는 완벽한 명분과 칼날을 주신 셈이죠. 부사장은 자신을 위해 궂은일을 처리하는 저를 가장 유능한 맹견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오만한 맹신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그의 목줄을 단숨에 끊어버릴 겁니다.”


지안은 화면에 붉은색 마커를 띄워 부사장의 자금 흐름도를 가리켰다.


“박 대리. 부사장이 관리하는 페이퍼 컴퍼니와 해외 은닉 자산, 그리고 과거 여직원들을 상대로 저질렀던 성추행 고발 무마 건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오늘부터 은밀하게 수집하세요. 최동욱을 칠 때 썼던 방식보다 열 배는 더 교묘하고 깊숙하게 파고들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부사장의 그림자까지 털어서 데이터로 만들겠습니다.”


황금과 권력의 단맛에 뇌가 완전히 절여진 박 대리는 이제 그 어떤 도덕적 망설임도 없이 부사장의 목을 겨냥했다.


“좋습니다. 철저하게 무균실을 유지하세요. 제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부사장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충직하고 멍청한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야 합니다.”


명령을 내리는 지안의 붉은 입술이 치명적인 독을 품고 빛났다.


그날 저녁. 강남의 최고급 프라이빗 요정.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며 외부의 시선이 완벽하게 차단된 이곳의 가장 깊숙한 VIP 룸에서는, 서지안의 전략기획실 부실장 승진을 축하하는 부사장 라인 임원들의 은밀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화려한 자개 장식이 빛나는 넓은 방 안, 기모노를 변형한 노출이 심한 유니폼을 입은 접대부들이 임원들의 술잔을 채우고 있었다. 최고급 발렌타인 위스키 향기와 룸 안에 밴 짙은 담배 연기, 그리고 늙은 수컷들이 뿜어내는 끈적한 웃음소리가 뒤엉켜 역겨운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탐욕스러운 연회의 한가운데, 상석에 앉은 부사장의 바로 옆자리가 지안의 몫이었다.


“자, 다들 잔 들어! 우리 태성그룹의 가장 날카롭고 아름다운 칼날, 서지안 부실장의 승진을 축하하며!”


부사장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건배를 제의했다.


“위하여!”


임원들이 일제히 잔을 부딪쳤다. 지안은 독한 위스키를 입술에 살짝 대는 시늉만 한 뒤 잔을 내려놓았다.


“서 부실장이 아주 우리 부사장님 총애를 한 몸에 받네. 최동욱 그 미친 노인네를 그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속에는 아주 구미호가 들어앉았어. 하하하!”


건너편에 앉은 재무본부장이 혀를 꼬부리며 천박한 농담을 던졌다.


지안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삼키며, 완벽하게 조율된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부사장님께서 큰 우산이 되어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그저 부사장님께서 가리키는 곳을 물었을 뿐인걸요.”


지안의 완벽한 아부에 기분이 한껏 고양된 부사장은, 거친 숨을 내쉬며 끈적한 손으로 지안의 허벅지를 덥석 움켜쥐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짐승은 주인을 물지 않지. 우리 서 부실장은 뼈속까지 내 사람이라니까.”


부사장의 두껍고 축축한 손바닥이 얇은 정장 바지 위로 살을 주무르듯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풍기는 역겨운 술 냄새와 타액이 지안의 뺨을 스쳤다.


순간 지안의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당장이라도 테이블 위의 얼음송곳을 들어 저 더러운 목구멍에 쑤셔 박고 싶은 살의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녀는 눈매를 곱게 휘며, 오히려 부사장의 빈 잔에 다소곳이 위스키를 채워주었다.


“부사장님. 술이 과하십니다. 내일 오전 일찍 이사회 보고가 있으시잖아요.”


“이사회? 하! 그딴 늙은이들 모임이 대수야?”


부사장은 지안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목소리를 잔뜩 낮춰 지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 실장. 내가 널 기획실로 끌어올린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이제 내 길을 막는 잔챙이들은 다 치웠으니, 진짜 큰 바위를 치워야지.”


“큰 바위라 하심은….”


“40층에 죽치고 앉아 있는 늙은 너구리. 대표이사 영감탱이 말이야.”


부사장의 눈동자에 서늘한 독기가 어렸다.


“전문 경영인이랍시고 내 아버지 시절부터 회사를 쥐락펴락하더니, 이제는 명색이 오너인 내 지시까지 사사건건 태클을 걸어. 서 실장이 내 사냥개라면, 이제 그 영감탱이 뒤를 캐서 완벽하게 숨통을 끊을 명분을 만들어 와. 그 영감이 나가떨어져야 이 태성그룹이 온전히 내 것이 되니까.”


지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아주 짧고 차가운 숨결이 빠져나갔다.


대표이사는 자신에게 부사장의 목을 치라고 검을 쥐여주었고, 부사장은 자신에게 대표이사의 목을 치라고 명을 내렸다. 두 마리의 거대한 포식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하필이면 가장 위험하고 악랄한 이단심문관을 독약으로 선택한 것이다.


지안은 이 기막힌 아이러니에 속으로 환희의 찬가를 불렀다. 완벽한 이중 스파이. 그녀는 양손에 쥔 칼날로 두 마리의 늙은 짐승을 서로 찌르게 만들어 자멸시킬 가장 끔찍한 무대를 세팅할 수 있게 되었다.


“부사장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제가 가장 날카로운 칼을 갈아 준비하겠습니다.”


지안이 나긋하게 대답하자, 부사장은 크게 만족한 듯 지안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 순간.


부사장은 지안의 측면 얼굴을 보다가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혀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에게 굴종하며 다소곳하게 웃고 있는 지안의 눈동자 깊은 곳. 그곳에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사냥개의 충성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도축장 주인이 살이 꽉 찬 돼지의 내장을 부위별로 어떻게 해체할지 가늠하는 듯한, 지독하게 차갑고 이성적이며 잔혹한 포식자의 안광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뭐지? 지금 이 느낌은.’


부사장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지안의 허벅지를 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인간 군상을 다뤄온 그의 육감이 무의식적으로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키운 이 아름답고 치명적인 사냥개가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날 만큼 비대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원초적인 공포.


“부사장님?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신가요?”


지안이 고개를 돌려 완벽하게 순진한 표정으로 묻자, 부사장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시선을 피했다.


“크흠. 아니야. 갑자기 술기운이 좀 도는군.”


부사장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의 뇌리에는 지안을 향한 아주 미세한 의심의 씨앗이 떨어져 내렸다. 사냥개가 주인의 손을 물기 전에, 목줄을 쥐고 있는 자신이 먼저 그 이빨을 뽑아버려야겠다는 잔혹한 방어 기제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밤 11시 30분. 연회가 끝난 요정의 입구.


임원들은 모두 만취하여 대리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부사장 역시 비틀거리며 자신의 최고급 세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지안은 대열의 끝에 서서, 요정 입구를 나서는 부사장의 차량을 향해 90도로 완벽하게 깍듯한 인사를 올렸다. 부사장의 차량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허리를 펴지 않았다.


멀어져 가는 붉은 후미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지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충직한 사냥개’의 가면에 쩍,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안은 핸드백에서 소독용 물티슈를 꺼내, 부사장이 주무르던 손과 손목, 그리고 허벅지 위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역겨운 새끼. 그 알량한 권력의 맛을 볼 날도 며칠 남지 않았어.”


지안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혐오스럽게 던져버리고는, 요정 건너편 골목에 시동을 끄고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밴으로 걸음을 옮겼다.


뒷좌석 문을 열고 타자, 노트북의 푸른 불빛을 얼굴에 비추고 있던 박 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부실장님. 도청 장치는 완벽하게 작동 중입니까?”


“물론이죠.”


지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방금 전 요정의 화장실에 들러 자신의 겉옷 안쪽에서 몰래 분리해 낸 아주 작은 마이크로 칩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연회 내내 부사장의 역겨운 희롱을 견뎌내는 척하면서, 그가 술에 취해 다른 임원들과 떠들어댄 수많은 불법 청탁과 비자금 흐름, 그리고 대표이사를 몰아내기 위한 뒷공작 계획들을 모조리 녹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안에 부사장이 자기 입으로 직접 불어버린 사형 선고문이 한가득 들어있습니다. 박 대리, 당장 이 음성 파일의 텍스트 변환과 분석을 시작하세요.”


박 대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칩을 넘겨받았다.


“그런데 부실장님. 방금 도청기를 모니터링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통화 내용을 하나 감청했습니다.”


“통화 내용?”


“네. 부사장이 방금 차에 타자마자, 비서실장이 아니라 인사팀의 남은 실무진에게 은밀하게 직통 전화를 걸었습니다. 서지안 부실장의 뒷조사를 지시하더군요. 과거 이력부터 최근 특감팀 시절 결재 내역까지 전부 파헤쳐서, 언제든 약점으로 쥘 수 있는 먼지를 찾아내라고.”


그 말에 지안의 눈매가 뱀처럼 좁혀졌다.


연회 자리에서 잠시 마주쳤던 그 서늘한 눈빛의 교환. 부사장 역시 직감적으로 지안의 위험성을 눈치채고, 그녀가 더 이상 통제 불능의 괴물로 성장하기 전에 목줄을 채우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멍청하긴. 사냥개를 토사구팽 하려거든, 사냥개가 주인의 총을 뺏기 전에 했어야지.”


지안은 차창 밖으로 화려한 강남의 불빛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박 대리. 대표이사님이 쥐여주신 전략 통제 권한의 칼집을 풀 시간입니다. 부사장이 제 꼬리를 밟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부사장의 목을 잘라 저자거리에 내걸어야겠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최정점.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두 마리의 포식자가, 피 묻은 왕관을 차지하기 위한 마지막 데스매치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이 거대한 무균실 안에서 살아남아 숨을 쉬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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