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균열

by 연구소장

인간의 믿음이란 사실 아주 얄팍한 유리판과 같다. 평소에는 그 어떤 단단한 논리도 튕겨낼 만큼 견고해 보이지만, 그 사람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원초적인 공포’라는 주파수와 정확히 일치하는 충격을 가하면, 단 한 번의 타격만으로도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의심이 많고 교활한 권력자일수록 남이 떠먹여 주는 달콤한 정보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몰래 훔쳐보았다고 생각하는 정보, 특히 그것이 자신이 평생토록 두려워하던 악몽과 완벽하게 일치할 때, 그들은 단 1퍼센트의 합리적인 의심조차 하지 못한 채 그 환상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만다.


지안은 태성그룹의 절대 권력자인 부사장의 뇌를 조각내기 위해, 가장 정교하고 치명적인 주파수를 맞추어 거대한 망치를 빼 들었다.


금요일 오전 8시 45분. 태성그룹 본사 지하 4층 VIP 전용 주차장.


어둡고 서늘한 지하 주차장의 적막을 깨고, 40층 대표이사 비서실장의 최고급 세단이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는 붉은색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극비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어제 지안과 대표이사가 은밀하게 합의하여 만들어낸 가짜 사형 선고문. 표면적으로는 대표이사가 병상에 누워 있는 회장에게 직보하러 가는 그룹의 중대 기밀문서였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주차장 출구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기둥 뒤의 사각지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낡은 검은색 SUV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끈 채 불쑥 튀어나왔다.


끼이익, 쾅!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둔탁한 파열음이 주차장을 울렸다. SUV의 범퍼가 비서실장 세단의 조수석 측면을 정확하면서도 아주 가볍게 들이받은 것이다. 차량이 찌그러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내부에 탑승한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에는 충분한 충격이었다.


“아씨, 뭐야 이거!”


놀란 비서실장이 운전석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동시에 SUV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후드티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하나가 허둥지둥 내렸다. 특별정보통제팀의 오 과장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렌터카를 몬 지 얼마 안 돼서 브레이크랑 액셀을 헷갈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 과장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호들갑을 떨었다. 회장님의 병실로 향하던 중요한 일정이 지체되자 비서실장은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아니, 눈을 어디다 달고 운전을 하는 겁니까! 차가 오면 서야지! 당장 보험사 불러요!”


비서실장이 차의 파손 부위를 살피며 오 과장에게 삿대질을 하는 그 짧은 1분 남짓한 시간.


SUV의 뒷좌석 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검은 모자를 쓴 박 대리가 고양이처럼 빠져나왔다. 그는 비서실장이 열어둔 세단의 운전석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충돌의 충격으로 조수석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붉은색 봉투. 봉인은 이미 충격으로 절반쯤 뜯어져 있었고, 그 안의 서류가 혀를 내밀듯 삐져나와 있었다.


박 대리는 초소형 고해상도 카메라를 꺼내어, 서류의 첫 장과 핵심 내용이 담긴 부분을 미친 듯이 연사하기 시작했다. 찰칵거리는 무음 셔터가 세 번, 네 번 번쩍였다. 그는 서류의 내용이 선명하게 찍힌 것을 확인한 뒤, 다시 문을 닫고 그림자처럼 SUV 뒤로 몸을 숨겼다.


모든 작업이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40초.


완벽하게 통제된, 사고를 위장한 기밀 탈취 작전이었다.


오전 9시 10분. 본사 40층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실 막내 직원이자, 부사장이 오래전부터 돈으로 매수해 심어둔 프락치인 최 사원의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최 사원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탕비실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메시지를 열었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으로 도착한 세 장의 사진 파일.


사진을 클릭해 확대한 최 사원의 동공이 튀어나올 듯 팽창했다.


사진 속 문서는 다름 아닌 ‘CEO 일일 직보 사항 - 회장님 친전’이라는, 평사원인 자신은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초1급 기밀 서류였다. 게다가 그 내용은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최근 발생한 임원진(송태섭, 백도훈, 최동욱)의 연쇄 이탈과 막대한 자금 손실 사태로 인하여, 현재 부사장의 위기관리 능력 및 경영 통제력이 한계에 달했음을 보고드림. 회장님께서 우려하시던 ‘후계자 리스크’가 현실화된 바, 기지시하신 ‘비상 후계 플랜’을 가동하고자 함.


미국에 체류 중인 김지훈(회장의 혼외자)에게 핵심 계열사의 차명 지분 15%를 즉각 양도하는 작업에 착수. 다음 달 임시 이사회에서 그를 글로벌 전략 총괄 사장으로 추대하여 실질적인 경영 승계를 마무리할 예정임. (대표이사 직인)]


“미, 미쳤다….”


최 사원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태성그룹의 주인이 바뀐다는,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내용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표이사 비서실장이 이 문서를 들고 회장님께 보고를 하러 갔으니, 이 서류의 신빙성은 100퍼센트였다.


그는 자신이 부사장의 프락치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극도의 공포와 흥분에 휩싸였다. 만약 부사장이 이대로 쫓겨나고 바다 건너에 있던 혼외자가 그룹을 장악한다면, 부사장의 끄나풀 노릇을 하던 자신의 목숨줄도 오늘 내일 하는 판국이었다.


‘당장 보고해야 해. 부사장님이 무너지면 나도 죽는다.’


최 사원은 식은땀을 훔치며 비상계단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 32층 부사장실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서지안이 치밀하게 설계한 거대한 도미노의 첫 번째 블록이 맹렬하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오전 9시 30분. 본사 32층 부사장 집무실.


부사장은 소파에 기대앉아 아침부터 올라온 결재 서류들을 신경질적으로 넘기고 있었다. 엊그제 서지안의 수족을 잘라내고 전략 통제 권한을 박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 피어난 찝찝한 불안감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때, 비서실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평소의 완벽한 의전은 내팽개친 무례한 행동이었다.


“부, 부사장님! 40층에 심어둔 최 사원이 다급하게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사안이 너무 중대해서 직접 보고를 드려야 한답니다!”


부사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40층 프락치가 아침부터 웬 호들갑이야. 들여보내.”


땀으로 흠뻑 젖은 최 사원이 집무실 안으로 굴러 들어오듯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품에서 구겨진 태블릿을 꺼내 부사장에게 내밀었다.


“부, 부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오늘 아침 40층 비서실장이 회장님 병실로 출발하는 길에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는데, 그때 유출된 극비 문서의 사진이 제게 입수되었습니다. 이걸 보셔야 합니다.”


부사장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띄워진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부사장의 눈동자가, 마치 정지 화면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집무실 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끔찍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미국에 체류 중인 김지훈(회장의 혼외자)에게 핵심 계열사의 차명 지분 15%를 즉각 양도하는 작업에 착수… 다음 달 임시 이사회에서 실질적인 경영 승계를 마무리할 예정임.]


“아….”


부사장의 입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손에 쥔 태블릿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은 곧 그의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이… 이게, 이게 뭐야.”


부사장은 짐승의 앓는 소리를 내며 태블릿을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쨍그랑! 태블릿의 액정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의 머릿속에 수십 년간 억눌러왔던 가장 끔찍한 악몽이, 그 지독한 트라우마가 둑을 허물고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널 믿고 이 거대한 태성그룹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으냐. 넌 내 피를 물려받은 것치고는 너무 무능하고 멍청해. 지훈이 그 녀석의 발끝만이라도 따라가 보란 말이다.’


젊은 시절, 투자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병상에 눕기 전의 건강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뱉었던 그 경멸 어린 시선과 독설.


미국으로 쫓겨난 그 천한 배다른 동생.


아버지의 뛰어난 사업가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실리콘밸리의 그 잘난 사생아 새끼.


부사장은 그룹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최근 몇 달간 피 튀기는 숙청을 감행하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발악했다. 송태섭을 치고, 백도훈을 쳐내고, 최동욱까지 감옥에 보냈다. 이제야 아버지가 자신을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서조차, 40층의 늙은 대표이사와 손을 잡고 자신의 목을 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피나는 노력들을 모두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와 ‘경영 통제력의 한계’라는 무능함으로 치부해 버린 채.


“개새끼들… 이 늙은 개새끼들이 나를 뒤통수 쳐?!”


부사장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책상 위에 있던 결재판과 명패를 모조리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펜과 서류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서실장과 최 사원은 덜덜 떨며 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부사장은 이성을 잃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자신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전두엽이 완벽하게 마비되고 편도체의 극단적인 공포만이 남은 상태.


그는 당장 이 끔찍한 환상을 확인해야 했다. 부사장은 미친 듯이 책상 전화기를 집어 들고 VIP 병동의 수간호사에게 직통 전화를 걸었다.


뚜… 뚜… 뚜….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더니 덜컥, 전화가 연결되었다.


“야! 당장 회장님 바꿔! 아버지 좀 바꿔보라고!”


부사장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수간호사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회장님께서 현재 절대 안정이 필요하셔서 외부와의 모든 접촉과 통화를 차단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부사장이야! 내가 아들인데 통화를 차단해?! 당장 전화기 귀에 안 대면 네년 목부터 날아갈 줄 알아!”


— 죄송합니다. 대표이사님께서도 회장님의 병실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라는 지침을 내리셨습니다. 부사장님의 전화도 예외 없이 끊으라는 회장님의 직접적인 하명이 있으셨습니다. 끊겠습니다.


뚜뚜뚜.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부사장은 끊어진 수화기를 허공에 든 채, 마네킹처럼 굳어버렸다.


사실 수간호사의 대답은 서지안이 어젯밤 미리 병원 측에 뇌물과 압력을 가해 조작해 둔 철저한 대본이었다. 하지만 의심과 공포에 완전히 잡아먹힌 부사장의 뇌는, 그 대답을 ‘아버지가 자신을 완벽하게 버렸다’는 최종적인 사형 선고로 받아들였다.


“아아아아악!!”


부사장은 수화기를 집무실의 대형 유리창을 향해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방탄유리에 거대한 금이 갔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어. 나를 버리고 그 천박한 사생아 새끼한테 회사를 넘기려고 해! 40층 영감탱이가 아버지를 꼬드겨서 내 자리를 뺏으려고 한다고!!”


그는 숨을 헐떡이며 비서실장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비서실장! 당장, 당장 오늘 오후에 40층 대표이사 그 영감탱이 뒷조사해서 끌어내릴 명분 찾아와! 그리고 우리 쪽에 남아있는 가용 현금, 차명 계좌에 있는 돈까지 싹 다 긁어모아! 지분율에서 지면 끝장이야. 그 사생아 새끼가 한국에 발을 들이기 전에 내가 먼저 지분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부사장은 생존 본능에 눈이 멀어 무리한 지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회사의 돈을 빼돌리고 불법적인 주가 조작을 감행해서라도 자신의 지분을 늘려야 한다는, 파멸로 향하는 가장 완벽한 엑셀러레이터를 스스로 밟아버린 것이다.


비서실장은 사색이 되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당장 현금 동원할 수 있는 루트를 전부 확보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본사 39층 전략기획실 부실장 집무실.


통유리창 너머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평화로운 집무실 안.


지안은 최고급 소파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태블릿 화면을 통해 32층 부사장실의 도청 오디오를 실시간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 “아버지가 나를 버렸어! 그 천박한 사생아 새끼한테 회사를 넘기려고 해! 가용 현금 싹 다 긁어모아!!”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부사장의 처절한 짐승 같은 울부짖음.


그것은 지안에게 세상 그 어떤 클래식 교향곡보다 아름답고 웅장한 승리의 전주곡이었다.


“균열이 완벽하게 발생했네요.”


지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선 박 대리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부사장이 이성을 잃고 비자금을 동원하기 위해 사내의 돈줄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기 시작할 겁니다. 그가 남기는 모든 불법적인 자금 융통과 횡령의 흔적을, 단 1원도 빠짐없이 캡처하고 녹음하세요. 그 뼈와 살이 분리되는 과정을 아주 선명한 고화질 데이터로 기록해야 하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부실장님.”


박 대리가 소름이 돋는 듯 몸을 떨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의 가장 깊은 열등감을 후벼파서, 스스로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악마의 연금술. 이 거대한 태성그룹의 진짜 주인이 되려는 자가, 지금 지안이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에 미쳐 발광하며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성벽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자, 미치광이의 무도회가 시작되었으니. 우리는 그가 가장 화려하게 추락할 수 있도록 바닥에 날카로운 가시밭을 깔아볼까요.”


지안의 붉은 입술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피 묻은 왕관을 향한 가장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피의 사냥이, 이제 막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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