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이성의 마비

by 연구소장

권력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가장 강력한 마약이지만, 공포는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맹독이다.


인간의 뇌, 그중에서도 논리와 합리적 판단을 관장하는 전두엽은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 앞에서는 아주 쉽게 전원을 꺼버린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편도체가 뿜어내는 원초적인 불안과 짐승 같은 생존 본능뿐이다.


아무리 최고급 교육을 받고 수조 원대 기업을 경영해 온 재벌 3세라 할지라도, 자신이 평생을 바쳐 쟁취하려 했던 왕관이 눈앞에서 ‘천박한 사생아’의 머리 위로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그의 뇌는 수십만 년 전 밀림에 고립된 원시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퇴행해 버렸다.


금요일 오후 3시. 본사 32층 부사장 집무실.


집무실의 공기는 짙은 담배 연기와 알코올 냄새로 찌들어 있었다. 부사장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친 채, 책상 위를 불안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바닥에는 산산조각 난 명패와 태블릿의 잔해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재무본부장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늦어!”


부사장이 핏발 선 눈으로 손목시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비서실장이 구석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땀을 닦아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아침에 보았던 그 치명적인 서류의 내용만이 사이렌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다. 40층의 늙은 대표이사와 결탁하여 자신을 몰아내고, 미국에 있는 이복동생을 다음 달 이사회에서 차기 대표로 추대하려 한다.


‘지분율. 그 새끼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지분율을 압도적으로 확보해야 해. 이사회에서 내 편을 들어줄 우호 지분과, 내가 직접 행사할 수 있는 차명 주식들을 모조리 긁어모으지 않으면 끝장이다.’


그때,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재무본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최동욱 인사본부장이 날아간 이후, 현재 부사장 라인에 남은 유일한 핵심 자금줄이었다.


“부, 부사장님! 부르셨습니까.”


부사장은 다짜고짜 재무본부장의 멱살을 틀어쥐고 책상 앞으로 끌고 왔다.


“가용 현금. 지금 당장 우리 그룹에서 흔적 없이 끌어다 쓸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있어!”


“네? 갑자기 현금이라니요. 이번 분기 결산이 코앞이라 자금 유동성이 묶여 있어서….”


“개소리 집어치워!”


부사장이 눈을 부릅뜨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해외 페이퍼 컴퍼니에 묶어둔 비자금, 그리고 R&D 센터에서 백도훈이 날려 먹고 남은 예산, 하청업체들 대금 결제 미루고 쥐어짠 돈까지 싹 다 긁어모아. 당장 오늘 오후 장 마감 전까지 태성그룹 주식을 무차별적으로 매집해야 해.”


“주, 주식을 매집하다니요? 부사장님, 그건 명백한 시세 조종이자 자본시장법 위반입니다! 게다가 회삿돈을 차명으로 돌려서 주식을 사들이는 건 횡령….”


“내가 오너야!! 내가 이 태성그룹의 주인이라고!!”


부사장의 사자후가 집무실의 방탄유리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40층 영감탱이가 아버지를 등에 업고 내 목을 치려 한단 말이야! 미국에 있는 그 사생아 새끼한테 회사를 통째로 넘기려고 지분 양도 작업을 시작했어. 이대로 있다가는 너도 나도 다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법이 문제야?!”


재무본부장의 동공이 튀어나올 듯 팽창했다. 회장님이 혼외자에게 회사를 넘기려 한다는 소식은 그에게도 청천벽력 같은 공포였다. 부사장이 무너지면 그에 기생하여 비리를 저질러 온 자신 역시 철창행을 면할 수 없었다.


“당장 홍콩과 스위스에 있는 차명 계좌 싹 다 열어. 그리고 주가 조작꾼들 동원해서 태성그룹 주가를 인위적으로 폭락시켜. 찌라시를 뿌리든 공매도를 치든 어떻게든 주가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다음, 우리가 모아둔 비자금으로 바닥에서 쓸어 담아! 다음 달 임시 이사회 전까지 무조건 지분율 20퍼센트 이상을 확보해야 해. 내 말 알아들어?!”


전형적인 편집증적 망상이 불러온 최악의 자충수.


부사장은 보이지 않는 적(혼외자)과 섀도복싱을 하며, 자신의 손으로 그룹의 재무 건전성을 박살 내고 불법적인 자금을 조성하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의 스위치를 눌러버렸다.


“하, 하지만 부사장님. 이 정도 규모의 자금이 움직이면 39층 전략기획실이나 금감원 감시망에 무조건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흔적이….”


“전략기획실? 거기 2인자가 누군지 몰라? 서지안 부실장이 내 사냥개야! 우리 뒤는 서지안이 완벽하게 닦아주고 장부 조작까지 다 덮어줄 테니까 넌 닥치고 시키는 대로 돈이나 끌어와!”


자신이 버리려고 했던 사냥개에 대한 맹신.


이성을 상실한 부사장의 뇌는, 서지안이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라고 굳게 믿으며 그녀가 파놓은 늪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알… 알겠습니다. 당장 해외 계좌 송금 루트를 열고, 쩐주들을 섭외하겠습니다.”


재무본부장이 식은땀을 닦으며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부사장은 텅 빈 집무실에 홀로 남아, 술병을 들어 나발을 불었다. 독한 양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지만, 아버지를 향한 지독한 증오와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갈증은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내가 어떻게 키운 내 회사인데. 핏줄? 그딴 거 내가 다 부숴버릴 거야. 아무한테도 안 뺏겨.”


미치광이의 중얼거림만이 32층의 썩은 공기 속을 맴돌고 있었다.


같은 시각. 본사 39층 전략기획실 산하 ‘특별정보통제팀’ 사무실.


32층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파멸의 굿판은, 39층에 있는 7명의 맹목적인 병사들에게는 그야말로 가장 짜릿하고 달콤한 블록버스터 영화나 다름없었다.


대형 스크린에는 태성그룹의 글로벌 자금망 트래픽이 실시간으로 붉은색과 푸른색 그래프를 그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부실장님! 걸려들었습니다. 부사장이 재무본부장을 쪼아서 홍콩 페이퍼 컴퍼니의 비자금 계좌를 열었습니다. 지금 막 300억 규모의 달러가 국내 차명 계좌 십여 개로 쪼개져서 송금되기 시작했습니다.”


헤드셋을 낀 박 대리가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주가 조작 세력들과도 연락이 닿은 모양입니다. 방금 텔레그램을 통해 태성그룹 하청업체 부도설과 신사업 무산 찌라시를 대량으로 살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내일 장이 열리면 주가가 곤두박질치겠군요.”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 여유롭게 네일 파일을 만지작거리던 지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공포에 질린 짐승은 내 예상을 단 1인치도 빗나가지 않네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그 절박함이, 결국 제 목을 매달 동아줄을 스스로 꼬아 만드는 법이죠.”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수백억의 회삿돈이 불법적인 경로를 타고 흐르는 그 선명한 증거들. 부사장이 서지안이 덮어줄 것이라 맹신하며 저지르고 있는 이 모든 범죄의 발자국은, 단 1원도 빠짐없이 지안의 하드디스크 속에 차곡차곡 사형 선고문으로 저장되고 있었다.


“오 과장.”


지안의 부름에, 한구석에서 새로 계약한 30억짜리 아파트의 인테리어 카탈로그를 황홀하게 들여다보던 오 과장이 즉각 책자를 덮고 달려왔다.


“네, 부실장님! 지시 내리십시오.”


이미 도덕적 판단 따위는 황금의 무게에 짓눌려 소각되어 버린 지 오래인 오 과장의 눈빛은, 지안을 향한 맹목적인 광신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태성그룹의 안위나 재무 건전성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여왕이 승리하여 더 큰 권력과 부를 하사해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재무본부장이 융통하고 있는 차명 계좌의 명의자 정보와 자금 출처를 완벽하게 문서화해서 정리하세요. 그리고 부사장이 주가를 떨어뜨리기 위해 뿌린 찌라시의 아이피 추적 내역도 모두 백업해 두고요.”


“알겠습니다. 법원에 제출해도 한 치의 반박도 못 할 만큼 완벽한 공소장 형태로 갈무리해 두겠습니다.”


지안은 다시 박 대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박 대리. 부사장이 바닥을 친 주식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우리가 쥐고 있는 여론망을 서서히 가동할 준비를 하세요.”


“여론망 말씀이십니까?”


“최동욱을 칠 때 썼던 사내 익명 게시판과 블라인드를 다시 뜨겁게 달굴 시간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찌라시가 아니라, 명백한 팩트를 던져줄 겁니다.”


지안의 붉은 입술이 치명적인 독을 품고 호선을 그렸다.


“오너 일가인 부사장이, 회사의 주가를 고의로 폭락시켜 개미 투자자들과 자사주를 보유한 임직원들의 피눈물을 뽑아내고, 그 뒤에서 비자금으로 헐값에 지분을 매집해 그룹을 사유화하려 한다는 끔찍한 진실. 이것이 사내에 퍼지면 태성그룹은 그야말로 피의 폭동이 일어날 겁니다.”


최동욱을 무너뜨렸을 때 군중은 ‘횡령범’이라는 거짓된 환상에 속아 분노했다.


하지만 이번 부사장의 케이스는 달랐다. 임직원들의 밥줄이자 피 같은 재산인 ‘자사주 주가’를 건드렸다. 이것은 대중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권을 건드린 행위로, 그 어떤 선동보다도 폭발적이고 통제 불능의 분노를 끌어내게 될 터였다.


“부사장이 긁어모은 지분이 임계점에 달하는 순간, 그가 쥔 모든 것이 썩은 동아줄임을 깨닫게 해주죠.”


지안의 서늘한 목소리에 7명의 심복들은 일제히 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제국의 후계자가 스스로 파멸의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질주하는 이 끔찍한 무균실 안에서, 포식자의 시선은 이미 승리의 축배를 향해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태성그룹의 주가는 그야말로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부사장이 동원한 작전 세력들이 끊임없이 악성 루머와 공매도를 쏟아냈고, 공포에 질린 개인 투자자들과 기관들이 물량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식 창은 온통 시퍼런 피멍이 든 것처럼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32층 부사장실.


부사장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주식 창을 노려보며, 재무본부장이 매수한 차명 지분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기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 더 떨어져라, 더 떨어져! 바닥에서 모조리 긁어모아! 내가 이 태성그룹의 절대적인 대주주가 되는 거야!”


이성을 상실한 괴물은 자신의 회사가 입는 천문학적인 손실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와 혼외자에게 그룹을 뺏기지 않겠다는 광적인 집착만이 그의 전두엽을 마비시켜 버렸다.


그리고 39층.


서지안은 부사장의 지분 매집률이 목표치에 도달한 것을 확인하고,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을 가볍게 톡, 두드렸다.


“박 대리. 투하하세요.”


지안의 단 한마디 짧은 명령.


그 순간, 러시아와 동유럽의 우회 서버를 통해 수천 개의 게시글과 메일이 태성그룹 사내 인트라넷과 외부 주식 커뮤니티, 그리고 주요 언론사의 경제부 기자들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폭탄의 내용은 단 하나였다.


[태성그룹 주가 폭락 사태의 배후, 오너 일가 부사장의 의도적인 주가 조작 및 수백억 대 횡령 비자금 조성 정황 포착]


사냥감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버릴, 군중 통제술의 피비린내 나는 서막이 마침내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부사장이 쌓아 올린 탐욕의 바벨탑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서울의 하늘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질 준비를 마쳤다.


지안이 부사장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군중의 분노를 조장하는 과정을 설정에 맞게 풀어보았습니다. 다음 전개인 '25화. 군중 통제술'로 곧장 이어가기를 원하시는지, 아니면 특정 부분을 더 부각하길 원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계속해서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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