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마지막 이단심문

by 연구소장

지옥은 펄펄 끓는 용암이나 뿔 달린 악마들이 고문을 가하는 곳이 아니다.


진정한 지옥은, 내가 굳게 믿고 디디고 서 있던 현실의 바닥이 사실은 허공이었음을 깨닫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강림한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때, 내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진실이 오직 나만의 망상으로 치부되어 허공에 흩어질 때. 인간의 이성은 그 압도적인 고립감 속에서 완벽하게 붕괴하고 만다.


주말 내내 태성그룹은 분노의 용광로였다.


부사장이 회삿돈을 횡령해 고의로 주가를 폭락시켰다는 기사는 주말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분노한 임직원들과 개미 투자자들은 본사 로비에 진을 치고 촛불 시위와 철야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월요일 오전 10시.


태성그룹의 명운을 결정지을 최고 의결 기구, ‘긴급 이사회’가 40층 대회의실에서 소집되었다.


오전 9시 30분. 32층 부사장 집무실.


사흘 내내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마침내 열렸다.


안에서 걸어 나온 부사장의 몰골은, 한때 대한민국 재계 서열을 다투던 황태자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초췌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거뭇하게 자라 있었고, 핏발이 선 눈동자 아래로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 안에서 며칠간 위스키에 절어 있었던 탓에 최고급 맞춤 정장에서는 시큼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기괴할 정도로 당당하고 오만했다.


자신을 데리러 온 특별정보통제팀의 오 과장과 보안 요원들을 보며, 부사장은 승리자의 미소를 흘렸다.


“서 부실장은? 이사회장으로 먼저 올라갔나?”


“네, 부사장님. 모든 준비를 마치고 40층에서 대기 중이십니다.”


오 과장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사장은 넥타이를 고쳐 매며 코웃음을 쳤다.


“그래. 주말 내내 저 밖에서 개미 새끼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군. 40층 영감탱이가 언론과 노조를 선동해서 내 무덤을 파놓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오늘 이사회에서 진짜 무덤에 들어가는 건 그 늙은 구렁이 새끼가 될 거다.”


망상에 완전히 잡아먹힌 전두엽.


부사장은 서지안이 바깥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할 완벽한 반전 카드를 쥐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맹신했다. 대표이사가 아버지를 조종해 혼외자에게 그룹을 넘기려 했다는 그 끔찍한 역모를 이사회에서 까발리고, 자신은 그룹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방어권을 행사한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올라가자. 내 왕관에 묻은 먼지를 털어낼 시간이다.”


부사장은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40층을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의 뒤를 따르는 오 과장의 입가에, 비웃음인지 연민인지 모를 기묘한 경련이 일었다.


오전 10시. 본사 40층 대회의실.


거대한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태성그룹의 사외이사들과 핵심 계열사 사장단이 무거운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주가 폭락과 배임 사태로 인한 극도의 피로감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상석에는 40층의 주인, 대표이사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측면의 배석자 자리에는,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화이트 수트를 차려입은 전략기획실 부실장 서지안이 서류철을 앞에 두고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재판을 주관하는 대법관처럼 우아하고 압도적이었다.


끼익.


대회의실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부사장이 들어섰다.


순간, 장내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사들의 눈빛은 마치 끔찍한 오물을 바라보는 듯한 혐오감으로 가득했다. 회사를 망친 주범이자 파렴치한 주가 조작범.


하지만 부사장은 그 적대적인 시선들을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며, 거만하게 걸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지안을 향해 은밀하게 턱짓을 보냈다. ‘준비한 패를 꺼내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지안은 부사장의 눈길을 서늘하게 무시한 채, 오직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사장.”


정적을 깨고 대표이사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주말 내내 자네가 벌인 짓 때문에 태성그룹의 시가총액이 수조 원이나 증발했네. 사내외를 막론하고 자네의 횡령과 주가 조작에 대한 구속 수사 촉구가 빗발치고 있어. 이사회는 오늘 자네의 대표이사 대행직 및 모든 임원직 해임안을 상정할 예정이네. 마지막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지.”


“해임안? 변명? 하하하!”


부사장이 돌연 실소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들이 흠칫 놀라며 수군거렸다. 부사장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상체를 숙인 채, 대표이사를 향해 살기 어린 눈빛을 쏘아보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대표님. 지금 이 방에서 변명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시치미 떼지 마! 당신이 병상에 계신 아버지를 조종해서, 미국에 있는 그 천박한 사생아 새끼한테 우리 그룹 지분을 양도하려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부사장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생아? 혼외자?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회장님께 숨겨둔 자식이 있었다고?”


이사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리는 사이, 부사장은 승기를 잡았다는 듯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래! 저 늙은 구렁이가 내 목을 치고 그 사생아 새끼를 다음 달 이사회에서 차기 대표로 추대하려 했어! 내가 회삿돈을 융통해서 주식을 매집한 건, 바로 이 회사가 외부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한 정당한 경영권 방어였다고! 내가 이 태성의 주인이니까!”


부사장은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려 지안을 쳐다보았다.


“서 부실장! 당장 그 증거 서류 꺼내! 지난주에 대표이사 비서실장이 들고 가려다가 우리가 입수한 그 ‘비상 후계 플랜’ 기밀문서 말이야! 저 영감탱이가 아버지를 속이고 꾸민 역모의 증거를 이사들한테 낱낱이 보여주라고!”


당당한 명령. 부사장은 지안이 그 치명적인 문서를 빔프로젝터에 띄우고 대표이사를 향해 단두대의 칼날을 내려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이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지안에게 쏠렸다.


지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철을 열고, 한 장의 문서를 꺼내 들었다.


부사장의 입가에 환희의 미소가 번지려는 찰나.


지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사장의 고막을 찢어버릴 만큼 차갑고 기계적이었다.


“이사님들. 안타깝지만… 부사장님께서 말씀하시는 ‘혼외자 경영 승계 문서’ 같은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뭐?”


부사장의 미소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지안은 이사들을 향해 돌아서며, 준비해 온 서류를 빔프로젝터에 띄웠다.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후계 플랜 문서가 아니라, 주말 내내 부사장이 지시했던 차명 계좌 송금 내역과 해외 페이퍼 컴퍼니의 자금 세탁 증거들이었다.


“제가 오늘 이사회에 제출할 자료는, 부사장님께서 지난 사흘간 극도의 편집증적 망상에 사로잡혀 저지른 명백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 증거들입니다.”


지안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대회의실을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부사장님께서는 최근 며칠간 심각한 조현병적 환각과 피해망상에 시달리셨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미국의 혼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망상에 빠져, 회사 자금 500억 원을 불법으로 빼돌려 고의로 주가를 폭락시키고 차명 지분을 사들이셨죠. 제가 수차례 만류하고 진정시켜 보려 했으나, 부사장님의 폭주는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서, 서지안… 너 지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부사장이 눈을 부릅뜨고 지안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의 뇌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인과관계를 전혀 연산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네가 40층 프락치를 시켜서 나한테 그 서류 사진을 보냈잖아! 대표이사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내가 먼저 자금을 끌어모아서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고 내 귀에 대고 속삭인 게 바로 너잖아!!!”


이성을 잃은 부사장의 발악.


하지만 이사들의 눈에 비친 부사장의 모습은, 횡령 사실이 발각되자 애꿎은 부하 여직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파렴치한 미치광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사장! 그만하시게! 추태가 도를 넘었어!”


사외이사 중 가장 원로인 이사가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생아 핑계를 대며 회삿돈을 주식 시장에 쏟아부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횡령 범죄를 감사팀장에게 뒤집어씌우려 드는가! 자네가 최동욱 본부장을 날려버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자네는 경영인이 아니라 당장 폐쇄 병동에 격리되어야 할 망상 환자야!”


“아니야! 서지안 저년이 악마라고! 저년이 다 조작한 거야!!”


부사장은 미친 듯이 바지 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기다려! 내 폰에 프락치가 보낸 그 기밀문서 사진이 있어! 이 사진만 보면 저 영감탱이와 서지안이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부사장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 앱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화면에 닿는 순간, 호흡이 그대로 멎어버렸다.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지난주 금요일 아침, 40층 비서실의 최 사원이 다급하게 보내왔던 그 ‘후계 플랜 서류’의 사진 파일과 메시지 내역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삭제되어 있었다. (주말 동안 부사장의 폰을 감청하던 박 대리가 원격으로 모조리 딜리트해 버린 것이다.)


“어… 어? 사진이… 사진이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부사장은 미친 사람처럼 화면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고, 온몸의 땀구멍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당장 40층 최 사원 데려와! 그 새끼가 나한테 보냈다고!! 걔를 부르면 다 증명할 수 있어!!”


부사장의 처절한 절규에, 지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회의실 뒷문이 열리고, 40층 비서실의 최 사원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왔다.


부사장은 구세주를 만난 듯 최 사원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야! 네가 말해! 네가 금요일 아침에 주차장에서 찍은 그 문서 사진, 나한테 보내고 직접 내 방에 와서 보고했잖아! 어서 이사들 앞에서 진실을 말해!!”


하지만 최 사원은 부사장의 시선을 피하며, 바닥에 엎드리듯 고개를 숙였다.


“부… 부사장님.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금요일 아침에 부사장님 집무실에 간 적도 없고, 그런 문서를 본 적도 없습니다. 주말 내내 부사장님께서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 ‘사생아가 쳐들어온다’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시길래… 저는 그저 부사장님의 병세가 악화되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뭐… 이, 이 개새끼가….”


부사장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최 사원 역시 서지안의 협박과 황금에 완벽하게 매수된 지 오래였다. 부사장이 이성을 잃고 횡령을 저지르는 사이, 그가 딛고 있던 모든 물리적, 인적 증거들이 지안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소각되고 조작된 것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자신을 변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횡령을 지시했던 재무본부장도, 자신에게 문서를 가져왔던 프락치도, 그리고 자신을 지켜주겠다며 맹세했던 사냥개 서지안마저도.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자신을 미치광이 망상 환자로 몰아가고 있었다.


“아아… 아아아아….”


부사장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기괴한 짐승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두엽의 붕괴. 자신이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완벽하게 조작된 세트장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인간의 자아는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부사장은 그제야 깨달았다. 송태섭, 백도훈, 최동욱이 겪었던 그 지옥 같은 고립과 파멸의 이단심문이, 사실은 종국에 자신을 도마 위에 올리기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것을.


“이 미친년아!! 네가, 네가 감히 나를!!!”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부사장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서지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두 손이 지안의 목을 조르기 위해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지안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는 그 폭력적인 달려듦을 환영하는 듯한 서늘한 희열이 스쳤다.


퍽!


부사장의 손이 지안에게 닿기도 전에, 대회의실 벽 쪽에 대기하고 있던 보안 요원들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부사장의 허리를 낚아채고 바닥으로 메다꽂았다.


“크아아악! 놔! 내가 태성그룹 오너야! 저년이 날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


바닥에 얼굴이 처박힌 채 팔이 꺾인 부사장.


태성그룹의 차기 오너이자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재벌 3세가, 이사진들이 모두 지켜보는 회의실 바닥에서 짐승처럼 침을 흘리며 발악하고 있었다.


“추태가 끔찍하군.”


대표이사가 차가운 눈으로 부사장을 내려다보며 의사봉을 들었다.


“오늘부로 부사장의 모든 임원직 및 등기이사직 해임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아울러 특경가법상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경찰에 즉각 수사를 의뢰할 것을 명합니다. 끌어내세요.”


탕, 탕, 탕.


의사봉이 세 번 내리쳐지는 소리는, 한 오만한 황태자의 사회적 생명을 영원히 끊어버리는 사형 집행의 타종이었다.


“서지안! 서지안 이 악마 같은 년!! 네년이 이 왕관을 쓰고 무사할 줄 알아!! 내가 죽어서라도 널 찢어 죽일 거야!!”


보안 요원들에게 짐짝처럼 들려 대회의실 밖으로 끌려 나가는 부사장. 그의 끔찍한 절규가 복도를 타고 메아리치며 멀어져 갔다.


대회의실에 남은 이사들은 그 충격적인 광경에 넋을 잃고 숨을 죽였다. 방금 전까지 그룹을 지배하던 폭군이, 한순간에 망상에 빠진 미치광이가 되어 도축 당하는 과정은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공포스러웠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서지안은 구겨진 화이트 수트의 소매를 우아하게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이사님들.”


지안은 바닥에 엎어진 척 연기하며 흩어진 서류들을 챙겨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방금 전 짐승의 습격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나긋나긋했다.


“위기는 모두 통제되었습니다. 썩은 살을 도려냈으니, 이제 태성그룹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기획안을 브리핑해 올리겠습니다.”


서지안. 현대의 이단심문관.


그녀가 설계한 가장 완벽하고도 끔찍한 처형대 위의 춤은, 오만한 제왕을 스스로 미치광이로 전락시켜 단두대에 오르게 한 채 화려한 막을 내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번지는 미소는, 이제 비워진 왕좌를 향해 가장 탐욕스럽고 잔혹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이전 25화제25화. 군중 통제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