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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구루 Jan 30. 2017

어머니의 눈물

익숙해지지 않을 마지막에 대하여




낯섬과 익숙함 사이 결혼 8년 차 맏며느리의 설이 지나간다. 연휴의 첫날은 늘 그렇듯 시댁에서 제사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물을 무치고 전을 부치고 많지 않은 음식을 종종거리며 준비하다 보면 금세 하루가 저문다. 둘째날 아침 돌아가신 조부모님 제사를 지내고 용인성묘를 한 후 시어머님의 부모님이 계신 안산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나면 길었던 연휴가 끝난다.



결혼한 첫 해 안산에 방문해 처음 조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던 날이 생생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님 댁의 어른들과 조카들까지 스무 분도 넘는 식구들이 장손의 처이자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인 나를 맞으려고 기다리고 계셨다. 쑥스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해서 안절부절 어렵고 힘든 자리였다. 익숙해 지기 힘든 그 시간을 편안함으로 바꾸어 준 것은 따뜻하고 정다운 어른들 이셨다.



시할머니의 막내며느리 되시는 외숙모는 싱크대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나를 볼 때마다 힘을 주어 자리에 앉히시며 말씀하셨다. "일하지 마. 여기 와선 그냥 좀 편히 쉬어. 여태 일하고 왔을 텐데 뭘 또 일해. 요즘 누가 시할머니 댁까지 와서 인사를 드리니. 시댁이 둘인 거나 다름없지. 이건 우리 할 일이니까 여기와선 맛있는 거 먹고 편히 쉬어. 그래도 돼." 그러면서 늘 덧붙이셨다. "요즘 일은 어때? 회사 다니기 힘들지? 그래도 장하다. 같이 일하면서 살림도 챙기고 너무 이뻐."



여든이 넘은 시할머니는 해저물녘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서는 나를 붙들고 말씀하셨다. "니 시어머니(자신의 딸)가 괴롭히면 나한테 말해.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줄게. 알았지?" 그러면서 얼마나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셨는지 누렇게 색이 변한 봉투에 아끼고 아껴 넣어둔 돈 십만 원을 주머니에 넣으시며 덧붙이셨다. "나는 네가 참 이쁘다. 우리 민호 어렸을 때 니 시엄마가 일나가서 내가 돌봐주었는데 직접 업어 키워 그런지 내가 제일 이뻐하지. 그런데 어쩜 이렇게 이쁜 아가가 민호 색시가 되었나 몰라. 나는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네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할머니 아니에요 저 이거 못 받아요." 아무리 손사래를 쳐도 '아가 사랑한다' 글씨가 써진 봉투는 어느새 주머니 깊숙이 찔러져 있었다. 나는 그런 어머님 댁 식구들이 좋았다. 명절이 아닌 날도 두어 달에 한 번씩 조부모님을 뵈러 안산에 갔다. 5남매를 자식으로 두신 할머니댁에는 늙은 부모를 걱정하는 자식들이 쉴새없이 드나들었지만 그렇게 한 번씩 안산에 들러 어른들의 얼굴을 뵙지 않으면 마음에 그늘이 졌다. 의무감이라기보다는 그리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고 복직을 하면서는 안산까지 조부모님을 뵈러 왕래하는 일이 매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내 아이가 아플 때 연차를 내고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다녀가시는 시어머니였지만 어머님의 엄마인 시할머니가 아플 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병원에 다녀오셨다는 이야기를 수화기 너머로 전해 들었을 뿐 직접 걸음 하지 못했다. 이번 설 시할머니 댁 방문은 지난 추석 이후 근 넉 달만의 걸음이었다.



시할머니는 몇 달사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오랜만의 걸음이 죄송해서 고개를 숙이고 "저희 왔어요." 인사하는 내게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고생했어. 보고 싶었어." 먼저 와 계시던 외숙모와 이모들이 차려주신 상에 식사를 마친 후 세배를 드렸다. 식구들이 일어설 때가 되자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사진 한 번 찍자." 식탁의자 두 개를 거실 중앙에 두고 어른들이 둘러섰다. 매번 늙어 흉하다며 사진 찍기를 거부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셨지만 이 날만은 순순히 자리를 지키셨다. 찰칵. 사진을 찍자 모두가 아무일 없었다는듯 잠잠히 제 자리로 돌아갔다.



성묘를 마치고 늦게 도착한 우리를 제외하고 모두 친정으로 또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렸다. 어른들을 배웅하고 자리에 앉아 아이의 재롱을 보고 있을 때 tv소음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여든여덟이 된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계셨다. 늙은 엄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감지한 나이 든 딸의 눈물이었다.



딸의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이며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울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이 들면 다 그런 거야. 슬퍼 할 것 없다. 갈 때가 되어 가는 거야. 너희들 키우면서 엄마는 행복했다. 자식들이 다 잘 돼서 자기 일하고 성공하는 것보고 가니 여한이 없다." 어머니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며 말씀하셨다. "엄마 미안해. 자꾸 미안한 것만 생각이나. 우리 엄마 없으면 나 어떻게 살지.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해가 넘어간다고 등을 밀어내시는 조부모님을 두고 집에 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주셨으면 조금만 더 건강히 살아주셨으면 하는 것은 어쩌면 남은 자식들의 욕심이었다. 늙은 부모에게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것이었다. 설픈 짐작으로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짐작은 해보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마음. 늙은 엄마와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픈 마음을 짐작해보던 밤 아주 오래 잊고 지냈던 어릴 적 한 장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쯤 이었을까. 식사시간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던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오래오래 살아야 돼.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알았지?" 한참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던 조숙했던 나는 이따금 앞도 뒤도 없이 엄마에게 그런 말들을 던지곤 했다. 엄마가 대답했다. "엄마가 먼저 갈 수도 있지. 살고 죽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나이 들면 엄마가 먼저 죽는 거지. 자식이 먼저 죽으면 돼?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너무도 현실적이었던 엄마의 대답에 그 날 나는 숟가락을 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서러운 울음을 울었다.



그저 엄마가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슬퍼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었다. 이제는 엄마도 언젠가 더 늙게 되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힘들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엄마가 여든이 넘고 아흔이 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엄마는 그런 존재니까.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마지막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본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는 얼마나 깊은 슬픔 속에 지내게 될까. 그 순간이 더디 오길 바라지만 정말로 마지막을 마주해야 할 때가 오면 그때 나는 그저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가만히 안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테니까.






글과 사진 | B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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