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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구루 Feb 27. 2017

그런 사랑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네가 커서 이 일기를 읽고 이해할 때쯤이면 이 외할아버지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있거나 이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겠구나. 우리 아들, 딸을 키울 때는 모든 성장과정을 다 기억할 줄 알고 기록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엄마나 이모, 외삼촌이 성장과정을 물으면 답변을 못 하는 것이 더 많아 당황할 때가 많아 이 글을 남기기로 하였단다. 가능하면 너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이어져서 네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으면 한다.' - 책의 서문 中




절친한 직장동료로부터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책을 대여받았다. 그녀의 아버지가 첫 손주를 위해 쓰신 육아일기였다. 글을 쓰는 내게 영감이 되길 바란다며 건네준 그 책을 나는 쉬이 펼치지 못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사랑을 펼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조금 더 준비가 되었을 때 천천히 책장을 넘겨보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착한 동료는 내게 책을 읽었는지 혹은 언제 돌려줄는지도 묻지 않은 채 묵묵히 3주가 넘는 시간을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는 계절이 다 지나가고야 말 것 같던 어느 밤,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서재에 앉아 투박하게 엮인 그 책을 꺼내 보았다.



나의 지인에게는 조카인 동현이란 이름의 아이가 태어나던 2005년 시작된 일기는 아이의 태몽과 첫걸음마 출생 신고하던 날 등의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고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인 2013년에 이르러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첫 손주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은 수년간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페이지엔 사랑한단 말 한마디 없이 매우 담백한 맺음말이 담겨있었다.



'동현아 건강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할아비는 한 달이 지나면 76세란다. 이 글로 너에 대한 일기는 마무리하련다. 안녕.' 그런데 어쩐지 그 글자들이 나에게는 '할아버지는 너를 정말이지 참으로 많이 사랑한단다.' 하는 글자처럼 보였다. 구태여 사랑한다는 말을 보태지 않아도 알 그런 마음들이 담긴 절절하고 애틋한 기록이었다.



글을 읽는 내내 늘 선한 얼굴로 주변을 먼저 배려하고 또 야무지게 제 일을 해내는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반듯하고 사려 깊은 그녀의 뒤에는 이토록 따뜻한 아버지가 있었구나 싶었다. 순간 그런 그녀가 너무도 부러워서 가슴이 다 콩닥콩닥했다.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었다. 아니 아버지는 있었지만 그런 사랑을 고백하는 아버지가 없었다. 늘 마음이 외로웠던 나의 아버지는 사랑을 표현하는데 서툴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늘 그의 사랑을 의심했다. 그의 인생에 나란 존재가, 자식이라는 무늬가 있기는 한 걸까 싶었다.



철없던 젊은 날, 그를 미워하게 만들었던 잊지 못할 에피소드들은 지금 생각해도 못내 서운할 정도다. 늦은 벼락공부로 대학에 들어갔던 내게 어느 날 아버지는 말했다. "그런데 네가 무슨 학교였지?." 전공이 무어냐도 아니고 어느 학교냐니. 요 앞 슈퍼 아저씨도 내가 어느 학교 다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취업을 준비하다 어렵게 붙은 면접을 보러 아침 일찍 길을 나서던 날이었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엄마가 말했다. "오늘 면접 보러 가는 날이니까 역까지만 좀 바래다주고 와요." 그런 내게 아버지는 충혈된 눈으로 건조하게 말했다. "택시 타고 가, 피곤해." 그런 그의 입에서 알싸한 술냄새가 섞여 나왔다. 그 날 나는 택시 안에서 소리 없이 울음을 삭혔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기에 내 인생은 이럴까 싶었다. 세상 그지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눈물이 나서 애써 감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고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정신을 차렸다. 김동률의 '출발'이었다.



'아주 멀리까지 가 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정신을 차려야지 싶었다. 타인의 삶을 부러워한 적도 내 삶이 부끄럽다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그즈음 나는 이따금 서러웠던 것 같다. 내게는 없는 평범함에 대하여 곱씹었고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야겠다 마음먹은 때였다.



평생을 자신이 만든 상자 안에 갇혀 살았던 나의 아버지는 늘 내게 무심했다. 나는 그가 없다고 생각하며 20대를 보냈다. 실제로 성장기 내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엄마의 무한한 신뢰와 의심할 바 없이 단단한 사랑이었다.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마주 앉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그거 알아? 내 인생에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 아빠였던 거. 나는 지금도 아빠가 너무너무 미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그래.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조금 더 평범한 아버지이지 못했는지 그게 그렇게 밉고 서운해." 엄마는 늘 그랬듯 말없이 나의 가시 같은 말들을 다 안아주었다.



그렇게 해묵은 말들을 쏟아낸 밤이면 속이 텅텅 빈 것 같은 공허감에 잠도 오지 않던 밤이 여러 날이었다. 한 번도 누군가의 삶을 욕심낸 적 없었지만 이상하게 아버지라는 존재만 생각하면 가슴에 서늘한 날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인생에 부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그 이름을 나는  오래도록 가슴에 묻고 살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과 그리움이 엉키어서인지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된 남편이 아직 상호작용이 되지 않던 아이의 신생아 시절 아이를 잘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그게 그렇게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받지 못했던 사랑을 남편이 아이에게 주는 사랑으로부터 보상받고 싶었던 심리였던 것도 같다. 그러나 원체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남편도 저를 꼭 닮은 동그란 얼굴의 딸아이에게는 주말마다 둘만의 데이트를 자처하며 에버랜드로 남이섬으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딸바보가 되어있었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딸아이와 저녁마다 얼굴을 맞대고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는 남편을 보며 내게는 없었던 따뜻한 아버지가 아이에게는 있는 것에 감사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던 날, 나는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만일 내가 그의 마지막 순간 곁에 있었다면 그는 내게 어떤 말을 했을까 여러 날 생각했다. 그가 내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을까 싶었지만 이생을 떠난 사람에게 더 이상 나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료의 아버지가 그의 손주에게 써낸 절절한 러브레터를 읽으며 그런 아버지를 둔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운 한편 문득 아버지의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싶어 가슴이 저몄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미처 전하지 못한 그 말이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설픈 짐작을 해보게 되는 것이었다. 표현이 서툰 그였지만 그런 그에게도 내게 고백할 조금의 사랑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 한편 위로가 되었다.



살아있을 땐 그저 밉기만 했는데 더 이상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지금에서야 나는 걸음마다 조금씩 그를 떠올리며 마음에 공간을 내어보는 중이다. 그것은 때때로 너무도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이제는 어떤 말도 전할 수 없는 그에게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했을 당신과의 관계를 그래도 사랑이었을 것이라 짐작해보며 또 얼마간의 계절을 보내보는 것이다.









글과 사진 | B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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