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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구루 Feb 12. 2017

인생이 참 짧더라

87세 형이 78세 아우에게 한 충고   




연로하신 조부모님께서 각자 다른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안산의 종합병원에, 할머니는 점차 증세가 심해지는 치매로 부천의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신 것이다. 여러 가지로 힘든 한 주를 보내고 맞은 주말이었지만 토요일 하루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입원해 계신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말을 미루고 다음 주말을 선택했을 때 두 분을 뵐 수 있을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남겨진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이 바빴다.



남편은 어렸을 적 할머니 할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일 나가신 엄마와 아빠 대신 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할아버지 손을 잡고 학원에도 다녔다고 했다. 다섯 자식들 중 처음 태어난 손자여서인지 조부모님은 여러 손주들 중에서도 남편을 유난히 아끼고 예뻐하셨다고 했다. 조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남편이 어려서 부린 만행을 줄줄 이야기하시는 조부모님의 얼굴 속에서 나는 남편에 대한 두 분의 애정을 듬뿍 느끼곤 했다.



토요일 오전 간단히 아점을 먹고 먼저 할아버지가 계신 안산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폐암 확진을 받은 지 오래 셨지만 살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운 나이에 부러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가 걱정돼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을 모시고 다녔지만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여든이 넘은 아비에게 더 이상의 치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도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 무리한 치료를 하기보다는 집에서 편안히 쉬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편이 좋겠다고 제안해왔다. 투병 중에도 할아버지는 내내 담담하셨지만 가래침에 섞여 나오는 핏덩이까지 감추진 못하셨다. 결국 할아버지는 입원을 하게 되셨다. 병실에 도착하자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라디오를 듣고 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이가 다가가 "할아버지! 서연이 왔어요!" 3번을 외친 후에야 할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돌려 아이를 보셨다.



"바쁜데 어떻게 왔어?" 하시면서도 창백해진 얼굴에 드리우는 희미한 웃음을 볼 수 있었다. 간병하시는 분이 자리를 비켜주시고 보호자 침대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 옆에 할아범 있지? 저이가 78살인데 아 글쎄 할머니만 오면 그렇게 둘이 싸움을 해대는 거야. 아주 잡아 먹을듯이 싸워. 그래서 어느 날 내가 그랬어. 내가 지금 여든일곱인데 살아보니 그래. 시간이 정말 빨리 가. 그러니 그렇게 투닥거리지들 말고 서로 간에 보듬어주고 조금 참고 그렇게들 살아. 후회하지들 말고." 그랬더니 일흔여덟 먹은 저이가 훌쩍거리며 울지 모야. 그래서 내가 울지 말라고 등을 토닥여 주었지 모야."



"아이 키우고 직장 다니고 니들도 힘들지? 그래도 지금이 좋을 때야. 그러니 일흔 넘어 저 이처럼 후회하지 말고 열심히들 살아.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알았지?" 남편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고 할아버지를 안심시켰다. 병원을 나서 다시 부천으로 향하는 길 여든일곱의 형에게 '살아보니 그래'라는 말을 듣고 감추고 싶은 눈물을 흘린 일흔여덟 할아버지의 마음과 저보다 살 날이 조금 더 남은 아우의 등을 쓸어주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했다.



여든일곱 번의 계절을 지나온 할아버지의 말에는 어떠한 형용사도 필요 없었다.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시간을 통과해온 그가 살아보니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의 말은 틀림없이 옳았다. 그런 형이 하는 말에 흘린 일흔여덟 아우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할아버지를 두고 병실을 나서는 길. 가늠할 수 없을 의미를 생각하며 한참이나 먹먹한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칠십 년을 넘게 살아도 후회가 남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실수를 하는 것. 산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부모가 되고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서른넷.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은 오늘이었다.



쳇바퀴 돌듯 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정신없이 사는 오늘이 의미 없이 느껴진다 투정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만들어갈 날들이 많았다. 그러니 힘들어도 그런 삶에서 오늘의 행복을 찾고 더 열심히 남은 시간을 가꾸어야지 싶었다. 그렇게 살다가 힘들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이면 할아버지의 한마디를 떠올려야지 싶었다. '살아보니 그래'   





글과 사진 | B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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