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고 있던 것들이 내 안에 있었다가도 순식간에 없어진다. 기대라는 것은 나의 상상과 욕망, 그리고 희망을 내재해 있고, 덩굴같이 퍼져나갔던 이들이 기대와 함께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니 현실감이라는 것을 키우라고 필요함을 느꼈다. 현실에 맞추어 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와 가까웠다. 나의 기대와 욕망이라는 것을 지금 내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꿈은 계속 키워나가고, 계획은 도구처럼 나를 일으켜주지만, 기대와 욕심은 잠시 있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조금은 바뀌었다. 순간의 감정기복을 넘어서면 내 마음은 나에게 현재 없는 무언가를 갈구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을 바라보고, 이 순간을 즐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우리의 숙제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하기란 당연한 일 같다. 내 순간을 나의 미래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고 최선을 다한다. 우리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만큼 정형화되어 있지 않기에.
정해져 있고 보장되어 있는 직장과 집이 없으니 현재에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기대는 기대일 뿐. 나의 안정된 계획은 계획이었을 뿐. 어떤 예상과 다른 순간이 다가오면 조금은 덜 실망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 나의 기대만을 바라보며 슬퍼할 때가 아니다. ‘좋음’과 ‘나쁨’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매니저들로부터 우리의 일하는 방식이 좋고,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 편하다고 전해 들었다. 이와 함께 3월에 만료되는 우리의 비자를 이곳에서 스폰서해주는 식인 2년짜리 비자를 받아보자며 이야기를 진행해 갔다. 나와 장은 이에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잡다한 취미생활을 갖고 있는 그와 나에게는 불만이 없는 곳이다. 우리를 따르는 동네 가게 개도 있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곳 2년 일하면 돈을 소비하는 일이 크게 없어, 열심히 한 곳에서 일을 해 우리가 원하는 프로젝트를 이바지할 배경이 될 거라 생각했다. 큰 기대를 안고 돈을 얼마나 모을 수 있을 것이며, 이후에 우리가 좋아하는 나라들을 방문할 계획을 설레는 꿈처럼 꾸고는 했다. 한 번 기대를 하고 나니 여러 가지의 기대가 함께 뻗어나갔다.
그날, 매니저가 우리에게 다가와 사실 현실적으로 어려운 감이 있을 거라고, 행정담당하는 사람들의 말을 전해주었다. 이번 달 말일에 커뮤니티 대표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하는 날이 있는데, 이 날 한 번 이야기를 꺼내보기는 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매니저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말이었지만, 그의 단어들은 우리의 감정이 최대한 상하지 않을 정도의 차분함을 지녔다.
나의 머리는 꽤나 복잡해졌다. 아니 나와 장, 우리 둘의 머리는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로? 다음 나라는 어디인가. 어디에서 살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둘 다 한국과 프랑스에서 정착할 자신은 아직 없다. 아직 서로의 모국어를 어느 누구도 완벽히 구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사주팔자 공부. 우리 둘의 사주를 보면 역마살이 고스란히 껴있다. 천생 우리는 장소를 옮겨 다닌다 한다. 짐을 싸고 짐을 푸는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 느껴지니, 나는 여행자의 영혼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가족을 꾸린다는 것이 어떨까 상상해 보았고, 한 곳에 조금은 오래 머물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이것, 저것 계획이 많으니 머리가 복잡하다. 그날, 잠에 들기 어려워하는 그를 발견했다. 나름의 미래 계획을 위한 토론을 해보았으나, 머릿속으로는 그저 복잡하기만 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에 계획에 따른 계획을 세우니 머리가 아프다.
이 불확실감과 불안정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일까? 안정하다고 믿었던 것도 사실은 불안정할 수 있고, 안정하다고 믿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함일 뿐이다. 불안정감 속에서 꿈꾸는 계획들은 불안정한 미래로 보였다. 2년 치의 이곳에서 지낼 동안의 일들을 예견하면서 세우던 안정적인 미래 계획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번 해는 나의 새로운 시작인가 보다. 언제나 그렇듯 말이다. 그리고 받아들임의 시간, 이번에는 고작 하루 정도가 지나니, 딱히 실망도 없고 새로운 시작에 설레기 시작했다. 불안정 속에서 나를 바라본 나와 나의 관계, 나의 직업, 미래계획들이 밀려오는 산뜻한 바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바질 페스토와 파스타
건조하고 덥기만 하던 날들이 최근 습하고 비가 오는 날씨로 바뀌었다. 비가 오는 날은 그래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 우리의 친구, 쌔미도 그날만큼은 에어컨을 쐬러 오지 않았다. 동네 개들도 한숨 놓고 바람을 즐기는 듯해 보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한숨 여유로워 보이는 분위기다.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니 음식을 찾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마침 손님들이 없어 매출을 위해 새로운 메뉴들을 만들지 않고 치킨과 감자튀김만 하던 날들이라 지루해져 가던 차였다. 손님이 많아지니 치킨과 감자튀김 말고 다른 런치메뉴를 준비했다. 신선한 바질이 들어온 날이라, 금방 시들기 전에 이것으로 페스토를 만들면 좋겠다. 색도 초록색이니 신선함을 불러일으킨다.
바질 페스토 레시피
바질 한 단
케일 한 주먹 정도 (바질만 넣으면 너무 바질 맛만 날 것 같아 나는 케일을 조금 섞어주었다. 베이비 시금치라던가, 다른 이파리로도 분명 대체 가능이다.)
파마산 치즈 가루 1/2 컵
아몬드 가루 1/2 컵
참깨 1/2
(너트 류는 호두를 사용해도 좋고, 전통식으로는 잣을 넣지만 호주에서는 이 모두가 비싸 나는 아몬드와 참깨로 대체했다.)
올리브 오일 1/2 컵
(조금 더 걸쭉하게 만들고 싶으면 오일은 조금 더 넣어도 좋다)
레몬 주스 2 테이블스푼
마늘 3알
(나는 다진 마늘로 4스푼 정도 넣었다)
소금
레몬페퍼가루
(그냥 후추를 사용해도 좋다)
페스토 만들기는 간단하다. 이 모든 재료를 믹서기에 갈면 끝이다. 만능 소스이다. 토스트에 살짝 발라줘도 간단한 아침식사 및 간식이 된다. 기호에 따라 올리브나 치즈를 올려서 먹는다. 나는 바질페스토를 이용한 파스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며칠 전에 만들어 냉동보관해 둔 캥거루 미트볼이 있어, 크림 베이스의 미트볼 스파게티를 생각해 보았다. 2년 전에 장과 함께 일했던 레스토랑 헤드셰프 뇨끼 레시피가 생각이 났다. 게으르고 일을 도무지 열심히 하지 않던 셰프였지만, 나에게 주방일을 할 기회를 주었고, 몇 안 되는 그만의 레시피가 가끔은 생각이 난다. 그는 크림 베이스 파스타 소스에, 바질 페스토를 조금 섞었고, 장이 오일에 절어둔 토마토 콩피(confit)를 뇨끼에 담아냈는데, 이 조합이 감칠맛 나니 맛이 좋았다. 핵심은 바질페스토가 다 잡아먹는 맛이 아니라, 은은하게 나타나는 바질 페스토와 크림소스의 조화였다.
크림소스는 간편하게 버터에 오랫동안 볶아서 만든 어니언 베이스다. 이에 바질 페스토를 살짝 넣고 토핑으로는 미트볼과 토마토 콩피를 올려준다. 살짝 파마산 가루와 이탈리안 허브 믹스를 솔솔 뿌리면 완성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이미 좋은 피드백을 들었다. 그러나 혹시 몰라 소심하게 진열대에 런치박스를 3개 정도 내놓은 것이 전혀 팔리지가 않는다. 저번 달에 한 번 만들어본 토마토소스 베이스 파스타는 내놓자마자 순식간에 팔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장은 굳이 뭣하러 걱정하냐면서 괜히 일을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궁금해 꼼수를 부려봤다. 용기에 담아두었던 파스타를 냄비에 가지고 와 토마토 페이스트에 섞어 새로운 파스타로 만들어봤다. 토마토 색과 맛은 은은하게, 크림 베이스에 바질 페스토로 감칠맛이 난다. 나의 묘책이 맞아떨어졌던 것일까, 토마토소스를 조금 가미한 새로운 파스타는 단시간에 팔렸다.
바질과 크림이 섞여 너무 채소 기반의 색깔이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토마토는 케첩의 색이고, 이곳 모든 이가 케첩을 알고 찾는다. 알고 있는 색과 맛을 찾는 그들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안에는 손수 만든 바질 페스토와 토마토 콩피. 작은 나의 흔적이 담겨있음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