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아파트 단지 사용법

by 리박 팔사

이것이 도시계획이 원했던 삶이었을까?


인트로

반듯하게 그어진 도로와 획일적으로 반복되는 아파트.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은 편리했지만 동시에 무엇인가 결핍된 느낌이 있었습니다.

삶에는 예측 불가능한 우연과 때로는 무질서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안에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채워나갔습니다.

계획된 도시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장 놀이터의 진화


신도시의 놀이터는 모래와 미끄럼틀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였습니다.

미끄럼틀은 비밀기지가 되었고 그네는 탈출로가 되었습니다.


놀이터뿐 아니라 지하 주차장과 주차 공간도 우리의 놀이터였습니다.

1990년대의 주차장은 차가 많지 않았고 특히 오후에는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차장 램프를 자전거로 내달렸고 주차선은 우리만의 경기장이 되었습니다.

단지 내 놀이터가 계획된 공간이었다면 주차장은 도시의 규격화된 공간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한 장소였습니다.

어른들이 계획한 공간은 껍데기였고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우리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그 단조로운 구조 속에서 우리는 놀이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었고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즐거움을 쌓았습니다.


제2장 녹지대의 재발견


아파트 단지 내 녹지대는 단지와 차도를 구분하거나 소음을 막는 기능적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녹지대를 우리만의 공간으로 재해석하여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녹지대에서 여름에는 매미를 잡으러 다녔고 겨울에는 눈이 쌓이면 썰매를 탔습니다.

오늘날 녹지대는 어르신들의 산책길이 되었고 푹신한 흙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누고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아이의 이름으로 벚꽃나무를 심는 행사가 열렸고 작은 묘목은 아이들의 이름표를 달고 푸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소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능적인 공간에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보러 일부러 녹지대 산책길을 찾았고 나무가 자라는 만큼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합니다.

오늘날 녹지대는 단순히 흙과 잔디로 이루어진 경사면이 아니라 기능을 넘어선 소통이자 관계의 공간으로 진화하였습니다.


제3장 관리사무소의 진화


신도시 대규모 단지의 관리사무소 또한 계획에 따라 기능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오직 관리비 수납, 민원처리, 시설 보수와 같은 행정 업무를 위한 공간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최근 관리사무소는 우리 동네를 스스로 꾸려가는 거점으로 변화하였습니다.

관리사무소는 단순히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을 넘어서 주민들이 직접 소통하고 참여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한쪽 벽면에는 작은 미니 도서관이 마련되었고 주민들은 이곳에 기증한 책을 자유롭게 읽고 빌려가며 자연스러운 교유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관리소 게시판은 단지 내 현안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이 오가는 소통의 장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온라인 투표였습니다.

단지 내 주요 결정 사항을 온라인 투표로 진행하면서 바쁜 일상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주민들도 손쉽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관리를 담당하는 공간에서 주민 참여를 독려하는 플랫폼으로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관리사무소는 단순히 행정 공간이 아니라 주민 스스로 동네를 꾸려가는 자치와 소통의 공간으로 바꾸게 된 셈입니다.


제4장 결론: 건축을 넘어 도시로 도시를 넘어 도시생활로


대규모 단지는 문제점도 많지만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정해진 틀을 벗어나 자신들의 삶에 맞게 공간을 유연하게 활용하였습니다.


이는 도시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건물을 짓는 사람이나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도시의 진정한 가치는 최첨단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따뜻한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계획된 도시의 완성은 거대한 마스터피스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삶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현재와 하루, 그리고 이야기로 채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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