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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샛별 Oct 16. 2021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리뷰

샛별의 씨네수다 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on Fire,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 감독: 셀린 시아마

• 장르: 드라마

• 국적: 프랑스

• 개봉: 2020. 01. 16

• 상영시간: 121분

• 출연진: 아델 에넬(엘로이즈), 노에미 메를랑(마리안느), 루아나 바야미(소피)

• 등급: [국내] 15세 관람가


*스포일러 있습니다.


  안녕, 마리안느


  사랑은 성별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두 여성의 '불꽃같은 사랑'을 담은 셀린 시아마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됐다. 각색으로 재능을 나타냈던 감독은 <내 이름은 꾸제트>(2016)로 세자로영화제 각색상을 <걸후드>(2014)로 스톡홀롬국제영화제 작품상을 받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칸 영화제(2019)에서 순위를 다퉜던 작품인데 결국 황금종려상은 <기생충>이 받았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각색상을 받았다. 국내에선 N차관람이 이어지며 셀린 시아마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호감을 보였다. 관객들은 퀴어영화로 <캐롤>, <문라이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이은 수작이라는 평을 내렸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다운로드 스크린 샷

 영화는 프랑스 18세기 시대를 다뤘다. 신분이 다른 세 여성이 지닌 고통을 안고 있다. 영화는 금기와 사랑을 놓고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동성애라는 사회적 인식을 깨고 본능에 충실한 두 여성. 신분 차이를 넘는 연대,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묵시록 등이 강렬하게 펼쳐진다. 화가인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언니를 대신 결혼을 해야는 처지에 놓였다. 언니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자살했다. 언니가 시집갔어야 할 자리에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대신 가야 하는 상황이다.

  마리안느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의 초상화 작업을 의뢰받았다. 영화는 첫 씬에서 두 여성의 대비를 통해 앞날을 암시했다. 성벽에 갇힌 갇힌 새처럼 지내는 엘로이즈와 거친 풍랑을 뚫고 화구를 들고 온 마리안느. 운명에 자신을 맡기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엘로이즈와 달리 마리안느는 진취적이다. 화구가 바닷물에 빠지자 그녀는 거침없이 풍덩 바다에 뛰어들어 화구를 건진다.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엘로이즈를 구출해 주러 온 구원자처럼.

  영화는 그녀들을 시종일관 빛과 어둠으로 교차시킨다. 햇빛은 바닷가 절벽을 걷는 그녀들의 원초적 욕망을 대변한다. 컴컴한 대저택을 비추는 촛불은 흔들리는 그녀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낮과 밤이 뒤섞이며 빛과 어둠은 그녀들의 미학적 아름다움을 더욱 극대화한다. 카메라는 그녀들의 머리카락, 옆얼굴, 손, 뒷모습 등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관객들은 그녀들의 우아함에 황홀해진다.



  영화는 여성이 지닌 신분적 한계를 건드린다. 마리안느는 화가지만 여성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품할 수가 없다. 대신 그녀의 그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전시된다. 귀족 신분인 엘로이즈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다. 죽은 언니를 대신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운명에 놓였다. 하녀 소피는 임신 3개월째다. 누구의 아이인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없는 현실로 소피는 낙태를 선택한다. 낙태도 어려운 시대라 소피는 갖은 방법을 쓴다. 달리기를 하거나 약초를 구해 사용해 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소피랑 함께 산파를 찾아가 시술하는 옆에 있어준다.

  엘로이즈는 산책 친구로 명명된 마리안느를 따라 바닷가로 뛰어나간다. 정신없이 달리는 엘로이즈를 본 마리안느는 불안하다. 그녀도 언니처럼 바다로 뛰어들까 겁이 났다. 엘로이즈는 모래 위에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먼저 자신에게 짐을 떠넘긴 채 떠나버린 언니를 생각했을 것이고, 언니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바다 건너 세상이 달갑지 않다. 곧 있으면 밀라노로 시집을 가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억울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와 한평생 살아야 하는 결혼제도에 순응해야 하는 처지가 비참하다.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

  마리안느는 귀족 부인에게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부탁받는다. 단, 엘로이즈 몰래 그려야 한다. 그녀가 포즈를 취해주지 않기 때문에 다른 화가들도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갔다. 마리안느는 일주일 동안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몰래몰래 그녀를 훔쳐보면서. 파도 소리는 계속 쏴아 귓가를 울리고 마리안느의 눈동자는 쉴 틈 없이 엘로이즈를 쫓기 바쁘다. 카메라의 시선은 마리안느의 시선과 일치한다. 관찰자의 눈으로 엘로이즈를 클로즈업해서 화면 전체에 담아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머리카락, 눈동자, 눈썹의 움직임.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 집에 돌아와 낮에 봤던 엘로이즈를 그렸다.



  기억으로만 그려야 하는 초상화 작업은 잘되지 않는다. 붓으로 드레스의 선을 잡아도 생생하지가 않다. 영화는 초록색 드레스를 3명에게 순서대로 입힌다. 처음엔 마리안느가 입고 거울을 통해 드레스의 선들을 잡아 스케치한다. 두 번째는  하녀에게 초록색 드레스를 입혀본다. 느낌이 나지 않는다. 결국 드레스의 주인공인 엘로이즈가 나중에 입게 된다. 세 명이 같은 드레스를 입는 상황이 재밌게 연출됐다. 신분과 직업은 다르지만 옷은 평등하다.

화가 마리안느
하녀 소피
귀족 엘로이즈

  엘로이즈 또한 마리안느의 동선을 느꼈다. 그녀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슬쩍슬쩍 쳐다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뜨겁다. 마리안느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은폐시키지만 잘 되질 않는다. 영화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게 사랑을 느껴 괴로워하는 장면을 보여줬지만, 엘로이즈도 괴로웠음이 짐작된다. 제약과 틀이 많은 사회에서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꺼내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마리안느에게 느끼는 타오르는 불꽃을 엘로이즈도 감추지 못한다.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완성시켰고 백작부인에게 보여주기 전에 아가씨에게 먼저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계속 마리안느를 속였던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마리안느의 그림을 본 엘로이즈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라며 그림에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라고 덧붙인다. 엘로이즈의 말에 화가 난 마리안느는 초상화의 얼굴을 뭉개버린다. 망쳐진 그림을 본 백작부인은 실력이 없으니 떠나라고 하자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할 거라고 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정식으로 화가와 모델이 된다. 엘로이즈는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마리안느는 물감과 붓을 들어 그녀를 채색한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쳐다보고, 엘로이즈는 스케치하는 마리안느를 본다. 서로는 고양되는 감정을 느끼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비밀스럽게 흥분된 감정을 숨기면서 화가와 모델의 역할에 열중한다. 다음날, 음악을 들으러 성당에 갈 거라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그건 죽은 음악이라며 자신이 직접 피아노(?)로 연주해 준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며 사랑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마리안느는 "폭풍우가 다가오면 곤충들이 느끼고, 불안에 떨죠."라며 가사에 맞춰 음을 빠르게 연주하고 "폭풍우가... 번개와 바람과 함께"말하고 번개 치는 것처럼 음을 두드린다. 음을 갖고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마리안느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엘로이즈. 엘로이즈의 사랑은 여기서 완성됐을까...

  영화는 그림, 음악, 이야기로 이들의 밀회를 보여준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책이 있냐고 묻는다. 아마도 마리안느가 갖고 있던 책은 오르페우스 신화였을 것이다. 마리안느는 식탁에 촛불을 켜고 소피와 엘로이즈에게 오르페우스에 관한 부분을 읽어준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에 나오는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시인이자 음악가이다. 오르페우스는 숲의 요정 에우리디케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뱀에게 복사뼈를 물려 죽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저승세계로 내려가 그녀를 데려오기로 하는데 저승의 왕 하데스는 그의 리라 연주에 탐복해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라고 허락한다. 단,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붙이면서. 이승 세계의 불빛이 보이자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보고 만다.


  결국 에우리디케는 저승세계로 떨어진다. 내용을 들은 소피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분노하지만 마리안느는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죠."라고 한다. 엘로이즈의 생각은 다르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라고. 여자가 "뒤돌아봐요" 말했을 수도 있다면서. 신화 내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는 엘로이즈의 통찰이 엿보였다. 그녀의 마음이었을까. 당연히 오르페우스의 잘못인 줄 알았던 부분을 에우리디케의 주체성으로 확장시킨다. 어쩜, 에우리디케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겠다.

 집을 떠났던 엘로이즈의 어머님이 돌아오고 완성된 초상화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송된다. 초상화 작업을 마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제대로 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질 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뒤돌아봐"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둘의 운명은 뒤집히지 않는다. 엘로이즈는 밀라노로 가서 결혼을 했고, 마리안느는 화가로 살아간다.


  이후 마리안느는 작품 출품 전시회에서 엘로이즈가 딸과 함께 있는 그림을 본다. 그림 속 엘로이즈는 책을 들고 있었는데 살짝 보이는 페이지가 28쪽이다. 저 책 28쪽에는 마리안느가 그려져 있다. 옆에는 다섯 살 정도 된 딸이 있었지만 아직도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잊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이별했어도 계속 남아 있다. 감독은 둘을 재회시키는 엔딩을 선물했다. 둘을 음악회에서도 만나게 해 줬다. 게다가 둘만이 알고 있는 추억 속 음악. 음악회에서 흘러나오는 곡이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악장'이다.



음악은 폭풍 치는 여름날 타오르는 불꽃처럼 그녀들의 사랑을 연주한다. 바이올린 선율은 엘로이즈의 고통을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관객은 마리안느의 시선이 되어 숨죽이며 엘로이즈를 보게 된다. 엘로이즈의 표정은 일그러진다. 마리안느는 여름 3악장을 들으며 저택에서 이 곡을 연주했던 마리안느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추억, 사랑, 아픔, 회환, 고통을 쏟는다.


  영화는 마리안느만 엘로이즈를 공연장에서 본 것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복선으로 등장한 '오르페우스와 에우디케'의 신화 설정이나 엘로이즈가 좌석에 앉은 후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점을 보면 아마도 마리안느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만약 엘로이즈가 마리안느를 봤어도 그녀는 오르페우스처럼 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쳐다봤다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디케처럼 추락하고 말 것이다.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비참하다.    



  비극 같은 시간을 엘로이즈는 눈물로 대신한다. 3분 넘게 엘로이즈를 클로즈업한 카메라는 무참하다. 마리안느 또한 그녀를 부르지 못한다. 다만, 그녀를 쳐다볼 뿐이다.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되어 엘로이즈의 얼굴에 계속 머문다. 연주가 끝나면 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며 기억을 움켜쥔 채 살아가겠지. 둘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림을 멈춰야 그림이 끝나듯 아직 둘의 사랑은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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