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BOOK연구소
( 2020.07.29 수요일 날 무작정 열차 타고 '광주'를 다녀온 기록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당시 전남대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명복을 빕니다.)
나만의 샛길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시내버스를 타고 수원역에 도착했다. 아무런 검색, 정보 없이 훌쩍 떠나는 여행이 그리웠다. 아무거나 타자. 단, 처음 가보는 도시를 선택할 것. 오! 9시에 떠나는 광주행을 끊었다. 광주라... 한 번도 발길 닿지 못한 도시다. 광주는 한강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고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한 곳이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 배우가 외국 기자를 태워 주고 발이 묶였던 그곳. 나도 드디어 가는 건가.
새마을호는 덜컹거렸다. 창밖에 펼쳐진 연둣빛 들판, 초록나무, 누런 강물, 짙은 흙바닥, 회색 구름이 내 맘을 씻어준다. 십자가 같은 전봇대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준다. 동그라미 빗방울은 유리창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진다.
기차 안에서 트롯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어떤 할머니는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손자와 통화를 한다. 어딘가 지명을 대더니 서로 만날 장소를 정하는 듯싶었다. 기차역은 늘 만남과 이별이 공존한다.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무대다. 기차역은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빨간 핸드백을 버리고 뛰어든 장소이기도 하다. 생과 사가 결정되는 곳이다. 영화 <디 아워스>에선 버지니아 울프 역을 맡은 니콜 키드먼이 런던행 기차를 타고 싶어 리치몬드 기차역에서 흐느낀다.
"내 상태가 어떤지 나만 알아요. 난 어둠 속에서 혼자 고통받아요. 난 런던의 거친 삶을 원해요."라며 남편 눈동자를 보면서 운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에서 철학교사인 나탈리(위자르 위페르)가 제자 파비앵을 기차역에서 만난다. 이 장면은 영화 포스터로 사용되었다. 기차역이라는 공간은 영화, 문학에서 숱한 장면들이 배경으로 쓰였다. 육중한 몸을 하고 달리는 기차지만 때론 로맨틱한 면도 있다.
기차는 마을을 우회해 빠르게 도시들을 통과한다. 미련 없이 떠나는 이별을 통보한 애인처럼 말이다. 평택, 천안, 논산을 거치자 해가 떴다. 익산에선 승객들이 제법 탔다. 다시 다음 역에서 우르르 내린다. 코로나로 기차 안은 텅텅 비어있다. 새마을호는 역마다 정차해 비슷한 듯 다른 플랫폼을 보여준다. 플랫폼에 내리는 승객과 타는 승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차 안에 울려 퍼지는 안내방송은 계속 마스크를 쓰라고 외친다.
광주역 도착했다. 흑흑. 폭풍처럼 비가 쏟아진다. 신발, 양말이 다 젖었다.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내렸는데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이다. 이런 오늘까지 휴관이란다. 비를 맞고 역사의 현장 전남 도청을 찾아갔다. '옛전남도청' 붉은 글씨가 보인다. 저 붉은 간판을 보니 혁명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헉. 또 휴관이란다. 밖에서 잠깐 서성이다 직원이 계시길래 똑똑~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멀리서 왔는데요... 기록관에 갔는데 휴관이라 도청 왔는데 또 휴관이네요. 죄송하지만 잠깐 둘러보면 안 될까요?" 직원은 생쥐 꼴인 날 보더니 열 체크, 인적 사항을 적고 문을 열어줬다. (앗, 감사합니다.ㅜㅜ)
부담될까 휘리릭 보고 도청 앞 식당을 찾았다. "광주옥" 광주 최초의 평양냉면 전문점 간판이 보였다. 물냉면을 시키고 젖은 양말을 벗고, 충전을 했다. 1947년부터 만들었다는 냉면을 그릇째 들고 후루룩 찬 국물까지 쭉 마셨다. 야속하게도 비는 계속 내린다. 식당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가서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통유리를 통해 본 전남도청 앞은 어느 도시와 같았다. 1980년 5월 18일. 그날은 달랐겠지. 계엄군은 시민을 폭행했고, 시민은 계엄군에게 저항했다. 학생, 어른들이 도청 앞과 금난로 거리 시위에 참가했고, 희생당했다. 역사는 흐르고 흘렀지만 그날 시간은 무참히 기록되어 있다. 그날을 거슬러 더듬어 보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광주는 그냥 도시가 아니었다. 당시 전남대 학생들, 일반 시민들이 독재에 항거했던 역사를 안고 있는 땅이었다. 광주에서 저항정신과 자유의 염원을 배운다. 광주는 비를 맞고 있는 나를 보게 했다.
김대중컨벤션센터에 내려 김대중 홀에서 그의 삶과 흔적을 목도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청주교도소에서 이희호 여사에게 깨알 같은 글씨로 안부를 묻는 엽서가 인상적이었다. 5.18문화센터로 이동해 조각상(?)을 보고 엽서를 쓰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 누구에게 보낼까 아들에게 엽서를 보냈다. 깨알처럼 쓰진 못했고 큼직하게 썼다. 내가 아들에게 무참했던 시간들을 어떻게 엽서로 담을 수 있을까. 난 한 줄도 쓰질 못했다. 그냥 안부만 남겼다.
시간이 빠듯하다. 다시 광주역에 도착해 싸 갖고 간 옥수수와 삶은 계란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수원까지 3시 30분이 걸린다. 왕복 7시간이 걸리지만 기차 타고 레이첼 야마가타가 부르는 노래 들으며 바라본 풍경은 홀가분했다. 광주!! 내 생애 광주를 비를 맞고 이리 싸돌아다니다니... 생전 못 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엇에 이끌려 이리로 왔는지 나도 모른다. 그냥 마음이 시켰다. 무작정 떠나보라고.
살다 보면 일상에 쫓겨, 가정에 붙들려 훌쩍 나서기가 어렵다. 떠나지 못할 이유를 찾으라면 금방이라도 몇 가지는 후다닥 댈 수 있다. 중요한 건 '마음먹기'아닐까. 상황은 언제나 날 놓아주지 않는다. 나를 지금까지 움직이게 한 건 따지고 보면 '마음'이었다. 이것만이 날 살아있게 했다. 늘 반복되는 일상에 가끔은 머리로 사는 게 아닌 마음으로만 살고 싶다.
종일 날씨가 우당탕 탕 하더니 집에 가는 길에는 노을이 기차를 비춘다. 다음 도시가 벌써부터 설렌다.
(2020.7.29 (수) 들고 간 책 <언어의 온도>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