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더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
죽은 뒤 단 하나의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다면, 당신은 무엇을 고르겠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원제: After Life)는 바로 그 질문으로 시작한다.
이승의 삶이 끝난 뒤, 영혼이 저승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이 있다.
바로 림보다.
영화 속 림보는 저승과 천국 사이의 정거장이다.
이 설정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림보를 떠올리게 한다.
단테의 림보는 지옥의 아홉 원 중 제1옥으로, 심판조차 받지 못한 채 머무는 곳이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같은 인물들이 그곳에 있다.
세상의 빛이 되었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시대 이전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국에 가지 못한 이들. 그들의 운명은 안타깝지만, 어쩌면 그것은 구원과 무관하게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과도 다르지 않다.
림보에 메시아가 나타나 구원받은 이들이 천국으로 인도되는 장면을 그린 명화도 여럿 남아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려낸 림보는 단테의 세계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이곳은 죄와 벌의 심판이 있는 단죄의 장소가 아니라, 이생의 기억을 정리하고 다음 세상으로 떠나기 위한 중간역이다.
중간역은 곧 ‘되돌아봄의 자리’다.
우리 인생에서 진정으로 남을 순간은 무엇인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묻게 만든다.
영화 속 림보에 도착한 영혼들은 일종의 면접을 치른다.
질문은 단 하나.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선택하십시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진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추억을 고르고, 목요일과 금요일은 그것을 영화로 재현하며, 토요일에는 작은 시사회를 연다.
스크린 위에 다시 살아난 자신의 기억을 마지막으로 보고, 이제 그 기억 하나만을 간직한 채 나머지는 모두 지운다.
그리고 스르르 그곳을 떠난다.
힘들었던 날도, 부끄러웠던 순간도, 이루지 못한 꿈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한 장면만이 영원히 남는다.
행복한 미소로 “내 삶은 원더풀했다”고 말하며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선택하십시오.”
전철 창가로 스쳐 간 바람의 감촉을 행복이라 말하는 사람, 도토리를 줍던 어린 날의 설렘을 떠올리는 할머니, 구름 위를 나는 상상 속에서 미소 짓는 청년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끝내 기억을 고르지 못한 채, 자신의 인생이 담긴 다섯 개의 테이프만 바라보며 망설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기억을 꺼내 놓는다.
기억은 언제나 선명하지 않다.
이랬던가, 저랬던가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날의 공기와 감정은 남는다.
흐릿한 영상 속에서도 마음에 남은 기분은 또렷하다.
바로 그 점이 인생을 닮았다.
완벽한 순간은 없지만, 불완전 속에서도 영원이 피어난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선택하십시오.”
그중 한 여인은 약혼자와 함께했던 봄날의 공원을 선택한다.
단 한 번 만났던 약혼자는 전쟁터에서 죽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산다.
세월이 흘러 그녀도 남편도 이곳에 도착한다.
그녀는 천국으로 가져갈 기억으로, 전쟁 전 약혼자와 함께 있던 봄날의 공원을 고른다.
그럼 남편이 선택한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아내와 함께 산책 나갔을 때,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평범한 일상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를 택했지만, 마음은 엇갈리고 말았다.
그녀의 원더풀 라이프는 찰나처럼 지나간 젊은 날의 약혼자였고, 남편의 원더풀 라이프는 곁에서 함께한 오랜 일상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젊은 나이에 죽은 약혼자는 여전히 기억을 선택하지 못한 채 림보에서 스태프로 머무르고 있다.
그는 이승에서의 약혼녀를 알아보고, 자신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를 얻는다.
그리고 결국 그는, 동료 스태프들과 함께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의 기억으로 선택한다.
우리는 지금도 더 크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려 애쓴다.
그러나 원더풀 라이프는 다르게 말한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잊힐 것 같던 작은 순간 속에 숨어 있다.”
인생의 보석 같은 장면은 바람, 햇살, 벤치, 함께 있던 사람들……
거창하지 않았어도 곁에 있던 것, 소소한 일상, 함께 웃던 시간이야말로 따뜻하고 소중한 순간임을 보여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질문은 남는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을 하나 선택하십시오.”
대답은 각자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어떤 이는 성공을, 또 다른 이는 어린 날의 기억을 고를 것이다.
정답은 없다.
결국 우리를 떠받치는 건 성공도 영광도 아닌, 함께 웃던 순간의 온기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또한 언젠가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 내 삶의 어떤 순간들도 원더풀 라이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눈을 감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웠던 지난날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 그 모든 것이 사진첩처럼 내 앞에 펼쳐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장면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나는 영화의 질문에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를 덧대어본다.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