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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의 아해와 얼굴들

영화 <얼굴> & 이상의 <오감도>

by 뭉클

박정민 주연의 영화 <얼굴>이 화제다.

영화는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얼굴에 덧씌운 잔혹한 잣대를 보여준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전각 장인 임영규와 그의 아들 임동환.

어느 날, 40년 전 실종된 아내이자 어머니 정영희의 백골 사체가 발견된다.

아들은 다큐멘터리 PD와 함께 어머니의 진실을 추적하게 된다.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어머니 정영희는

" 얼굴이 괴물 같다"
" 추하다 "
" 기괴하게 생겼다 "

하나같이 얼굴을 이야기한다.

영화 내내 그녀의 얼굴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은 알 길이 없다.

눈먼 아버지 임영규는 장애인으로 사회의 모욕과 멸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장에 매달린다.

" 아름다운 건 존경받고 추앙받고, 추한 건 멸시당해"

이 짧은 대사는 이 영화가 겨누는 현실을 압축한다.

<얼굴>은 우리에게 묻는다.

추함은 과연 누구의 얼굴에 있는가.

정영희는 정작 본인은 세상의 편견과 차별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그는 침묵 속에만 있지 않았다.

성폭행을 당한 동료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던 순간 그녀는 집단의 합창을 뚫고 넘어서는 인간다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반면 남편 임영규는 달랐다.

앞을 볼 수 없었기에 더 진실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오히려 세상에서 홀대받던 그가 세상의 말에 휘둘리며 아내를 모욕으로 여기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내가 아름다운 거, 추한 거 그것도 구분 못할 것 같아 "

그의 말은 무지와 오만이 결합된 폭력이었다.

결국 그는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아내는 연대를 택했고, 남편은 폭력을 택했다.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들은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서 나는 시인 이상의 <오감도>를 떠올린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
제13의 아해까지 무섭다고 그리오.

한 아이가 "무섭다" 말하자 옆의 아이도 따라 말한다.

"무섭다"

그러자 그 옆의 아이도, 또 그 다음의 아이도.

처음에는 서로 다른 얼굴이었지만 끝내는 같은 목소리만 울려 퍼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설명할 수 없기에 더 커지고, 소외되지 않으려는 불안은 사람들을 같은 말, 같은 얼굴로 묶어버린다. 그 순간 개별자의 얼굴은 지워지고, 합창만 남게 된다.

영화 <얼굴> 속 군중의 폭력, 눈먼 남편의 선택은 이 합창의 연장선에 있다.

무지와 오해는 차별과 편견과 공포를 낳고, 곧 폭력으로 번진다.


오늘날의 아해들도 도로를 질주한다.

SNS의 짧은 영상, 맥락 없는 뉴스 한 줄에 세상이 흔들린다.

사람들은 확인하지 않은 채 공유 버튼을 누른다.

일종의 "무섭다"는 말이 집단적으로 전파되는 속도는 그 어떤 시대보다 빠르다..

유행에 뒤처질까 불안해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 순식간에 몰려드는 집단적 비난 속에 개인의 얼굴을 지운다. "좋아요"와 "조회수"의 숫자가 집단의 합창을 대신한다.


오래전 친구에게 들은 그 옛날 여고의 교련 수업이야기가 떠오른다.

군복 입은 교련 선생의 구령에 따라 학생들은 이유도 모른 채 줄을 섰다.

"받들어 총!
충성! "

밑도 끝도 없는 군부독재시절 군인들의 구호가 여고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줄을 잘 못서서, 구호를 따라 하지 못해서, 삼각붕대를 잘 못 감아서... 매시간 모욕과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그저 모두가 함께 긴장한 채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행진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우스꽝스러운 행렬에 대해 그 당시에는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오감도>의 아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무섭다"를 퍼뜨리듯, 그 시절 학생들은 이유 모를 "충성"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아이들이 습관적인 "공유"와 "합창" 속에 휩쓸리듯이.

얼굴은 지워지고, 무지만 남는다.

결국 질문은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얼굴>은 우리에게 무지와 편견이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보여준다.

정영희를 괴물로 만든 것은 그녀의 얼굴이 아니다. 그 얼굴에 덧씌운 세상의 오해와 멸시였다.

그러나 영화는 동시에 대안을 보여준다.

동료를 위해 목소리를 내던 그 순간만큼은 정영희는 인간다운 얼굴을 회복했다. 집단의 합창을 넘어선 목소리, 그것이 영화가 남겨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무지가 불러오는 공포와 폭력을 넘어서는 길, 해답은 가까이에 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남이 덧씌운 말이 아니라, 내 눈과 내 마음으로 다른 얼굴을 바라보는 것, 집단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옳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며 무지를 떨쳐내는 태도.....

오늘도 우리는 아해들처럼 달리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당신은 어떤 얼굴로 질주를 멈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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